제국 – 닐 퍼거슨 지음, 김종원 옮김/민음사 |
닐 퍼거슨이 누군가?
알게 뭐야. 옥스퍼드 대학교를 나온 수재이든지 말든지 그다지 관심 없다. 다만 쓴 책마다 평점 별 네 개를 유지하는 걸 보니 역사책 하나는 기똥차게 쓰는 게 분명하다. 중요한 건 그것 뿐.
이 책에서 닐 퍼거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단일 정치체제를 유지한 영제국의 시작과 끝을 지루하지 않게 풀어낸다. 그 시대의 평범한 농부, 위대한 정치가의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대상과 역사적 의미를 논한다. 말도 안 되게 커다란 의미의 확장이 되기 쉬운 시도인데도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지고 한 장, 두 장, 금세 마지막 장이다.
영제국은 그 크기와 종속 기간, 후대에 미친 영향에서 그 이전의 어떤 제국과도 다르다. 그럼에도 동시대의 영제국과 비교하는 게 어이없을 만큼 형편 없던 일본 제국의 통치 하에 있던 한국에선 “제국”이란 단어만으로도 거부감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인지 20대 중반이 넘어서야 영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시작은 중동 지역에 대해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이었다. 서구 열강이 지도를 찢어 나눠 가졌던 그 지역의 여러 국가 중에 그나마 현재 잘 운용되는 곳은 너나 할 것 없이 영국의 식민지였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인가? 뭐가 특별하기 때문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영제국의 과오와 과실을 공정하게 다루려 노력한다. 다만 한국의 불행한 근대사를 고려할 때 이러한 노력조차 부족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결론부에서 제국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지려 하지 않는 미국에 아쉬움을 나타내는 대목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나로선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는데, 팍스아메리카나의 몰락 이후에 더 망나니 같은 열강 사이에서 고생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량학살이 일어나는 곳에서 수백만 명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누군가 그 곳을 점령해서 신뢰할 만한 정치 및 경제 체제를 구축하길 바란다. 그러려면 영제국처럼 본토의 자본이 해당 국가에 적극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미국은 적극적인 개입을 꺼릴 뿐더러, 이라크와 같은 곳에서조차 상황이 불리해지면 납세자의 압력과 정치적 부담에 떠밀려 난장판을 그대로 두고 철수해버린다. 이래서야 분쟁은 끊이지 않을 뿐이다.
저자가 아닌 나의 정치적 견해는 이만하자.
이러한 관점에 반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지” 같은 “촌놈” 일본 제국주의와는 색다른 “원조” 제국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어서 변화해 갔는지 알아보는 재미를 느껴볼 기회가 될 것이다.
서론
2011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7:08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주장
- 민족주의/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는 경제적 착취이며 식민화된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준다.
- 자유주의
제국주의는 시장의 힘을 왜곡(군사력에서부터 중심지에 유리하게 사업을 조작하는 특혜 관세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사용하여)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중심지 경제에도 이익이 아니다.
-
공통적인 가정
국제 교류의 이익이 제국을 건설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다.
닐 퍼거슨의 생각
영제국의 과실을 인정하되 그 역할을 과소평가하진 말자.
역사상 어떤 조직도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영제국보다 재화,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확산하는 데 더 많이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조직도 세계 곳곳에 서구의 법, 질서, 통치 규범을 강요하는 데 그 이상 기여하지 못했다. 이 모두를 ‘신사적인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경제학의 영역에서 이룬 업적의 규모(그리고 근대성)를 감히 헐값에 처분하는 행위이다.
제국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제국이 저지른 죄악보다 훨씬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만의 특징
- 영어
- 잉글랜드 형태의 토지 소유권
-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은행업
- 보통법
- 프로테스탄티즘
- 단체 운동 경기
- 제한 국가 또는 ‘야경’ 국가
- 대의제
-
자유의 이념
영제국의 업적과 과실
과실
인종주의,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 그리고 그와 관련한 비관용
업적
- 최적의 경제 조직 체계인 자본주의의 승리
-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랄라시아의 영국화
- 영어의 국제화
-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해석의 지속적인 영향력
- 훨씬 사악한 제국들이 1940년대에 소멸시킬 태세를 갖추었던 의회 제도의 생존
1장. 왜 영국인가?
2011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7:19
모건의 이력은 제국의 건설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완벽하게 예증해 준다 해적 행위가 정치 권력으로 이동한 것이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적인 어떤 것이 영국 본토에서 일어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8세기 초 잉글랜드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경제가 탄생하고 있었다. 즉 세계에서 첫 번째 대량 소비 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즉 과중한 수입 관세는 국내 커피 소비를 제한하고 싹트고 있던 차 산업이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몇몇 국민적 특징들처럼, 커피보다 차를 선호하는 잉글랜드 인들의 특징 역시 재정 정책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인도
7년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에 대해
이는 해군의 우위에 기반을 둔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영국이 프랑스보다 결정적으로 우위에 있는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바로 돈을 빌리는 능력이다.
영국 해군의 승리 이면에는 국채가 있었다. 국채의 증가(7년 전쟁 동안 7400만 파운드에서 1억 3300만 파운드로)는 영국 재정 능력의 척도였다.
1615년에 영국 섬들은 경제적으로 주목할 만하지 못했고, 정치적으로는 통제가 잘 안 되었고, 전략적으로도 이류의 존재였다. 200년 후에 영국은 오대륙에 마흔세 곳의 식민지를 망라하는 큰 제국을 건설했다. …… 그들은 에스파냐 인들에게서 강탈하고, 네덜란드 인들을 모방하고, 프랑스 인들에게 타격을 주고, 인도인들을 약탈했다. 이제 그들은 최고가 되었다.
2장. 백색 역병
2011년 4월 3일 일요일
오전 1:45
북아메리카
플랜테이션
아일랜드의 식민화
이론상 플랜테이션은 식민화, 즉 정치적 변경 지역에 충성스러운 백성들을 내보내 정착지를 건설하는 고대 그리스의 관행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플랜테이션은 오늘날 우리가 ‘인종 청소’로 알고 있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듯 아일랜드는 영국 식민화의 실험실이었고, 얼스터는 플랜테이션의 원형이었다. 그것은 제국이 무역과 정복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이주와 정착에 의해서도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메리카 진출
요컨대 영국령 아메리카의 경제는 불확실했고, 영국령 아메리카는 경제만으로 건설될 수 없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다. 즉 이윤 동기에 더하여 대서양을 건너게 하는 무언가 부가적인 유인책이 필요했다. 그 무언가는 바로 종교적 근본주의였다.
- 퓨리터니즘과 이윤 동기의 결합
-
남아메리카의 유럽 이주민과는 달리 높은 출산율
- 독립 이전에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한 총 150만명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인들 가운데 여성은 25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
북아메리카의 영국인 정착자들은 수적으로도 많았을 뿐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오도록 장려되었으므로 그들의 문화를 다소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미국의 독립 전쟁
보스턴 티 파티 사건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그 당시 차의 가격은 어느 때보다 낮았다. 그 시기에 차에 부과되는 세금은 파운드당 1실링에서 3페니로 삭감된 상태였다.
분쟁의 원인
진정한 원인은 바로 헌정 원리(영국 의회가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그들의 동의 없이 과세할 권리)였다.
세뮤얼 애덤스의 유명한 슬로건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영국인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국인임을 강력히 단언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말하길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대서양 반대편에 있는 그들의 동료 신민들이 누리는 자유와 동일한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결과
남아메리카 식민지의 반란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한 에스파냐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이 손실로 인해 붕괴되지 않았다. 실로 13개 식민지의 상실은 영국의 식민지 팽창을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도록 박차를 가해 훨씩 더 널리 퍼져 나가게 한 것처럼 보였다.
누구나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를 듣거나 부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덜 알려진 것은 그 노래의 작곡가가 6년 동안 성공적인 노예 상인으로서 시에라리온에서 카리브 해로 대서양을 건너 수백 명의 아프리카 인들을 실어 날랐다는 사실이다.
호주
토착민 말살
그러나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억제하는 당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영국 식민지들을 독립적인 정착민들의 공화국과 차별되게 하는 점이었다. 합중국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는 그와 같은 억제 세력이 전혀 없었다.
캐나다
실로 더럼 보고서는 제국을 구한 책이라고 주장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보고서 내용은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자들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식민지 개척자들은 백인 식민지들을 통치하는 사람들이 먼 곳에 있는 왕의 권위를 대신하는 사람들에게서 만이 아니라, 식민지 개척자들의 대의 기관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책임 정부제는 제국의 관례와 자유의 원칙을 조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더럼 보고서가 의미한 것은 캐나다 인들, … 인들의 열망이 독립 전쟁의 필요 없이 해결될 수 있고 해결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3장. 선교
2011년 4월 3일 일요일
오전 1:46
기독교로 개종하려는 복음주의적 욕구와 자본주의로 개조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욕구, 이러한 쌍둥이 경향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영제국 전체에 유포되었다.
세포이의 폭동 이후
1880년대에 이르면 대부분의 영국 관리들은 선교사들을 기껏해야 어리석은 자들로,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파괴적인 자들로 간주하면서 1820년대 전임자들의 습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또 다른 문제였다.
4장. 신의 혈통
2011년 4월 3일 일요일
오후 7:49
도대체 어떻게 900명의 영국 사무관들과 7만 명의 영국 군인들이 2억 5000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을 통치할 수 있었을까?
거리의 소멸
- 증기선
- 전보와 해저 케이블
- 철도
- 지도와 측량술
인도 통치
통치의 기초는 군사력이었다. 여기서 군대는 제국의 전략적 예비 부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군대는 또한 제국의 아시아 병기고의 내적 안전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령 인도는 무장한 철권으로만 지배되지는 않았다. 네이피어처럼 규율에 엄격한 인물뿐 아니라 유력한 정치가도 있었다. 즉 정의를 실현하고, 무너진 교량을 둘러싼 사소한 논쟁에서 완영한 기근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투하며 인도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민간 행정가들이 있었다. 그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때로는 지긋지긋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한 엘리트들은 ‘하늘이 내린 사람들’이라는 자신들의 별명을 자랑스러워했다.
인도인으로 구성된 관료 계층
그들 밑에 있는 훨씬 더 큰 또 하나의 관료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관료 계층은 인도인들로 구성된 비서약 행정 사무직으로, 각 관구의 지역 탈루카와 타실의 일상 행정을 책임지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인도의 통치자들만이 영국인들에 의해 대체되고 정복당했던 것이다.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종전과 비슷하게 해 나갔다. 사실 인도인들 가운데 주요 계층에게는 영국의 통치가 자기 향상의 기회였다.
친영국적인 인도 엘리트 출현의 핵심은 교육이었다.
인도는 영제국의 전략적 중추였다. 영국인들이 영국화된 엘리트를 소외시킨다면 그 기초는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다. (인종주의 근거를 둔 백인폭동에 대해).
토리엔탈리즘
독립한 아메리카 합중국이 높은 관세 장벽 뒤에서 초기 산업들을 보호하고 있던 19세기에 인도에 강요된 자유 무역은 토착 제조업자들을 유럽의 치명적인 경쟁에 노출시키고 말았다.
인도 민족주의는 대중의 빈곤에 의해 힘을 얻은 것이 아니라 소수 특권층을 거부한 데서 힘을 얻었다. 매콜리 시대에 영국인들은 영어로 말하고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 엘리트들, 즉 영국인의 행정 체계가 의존했던 보조 행정 사무직 계급을 탄생시켰다. 머지않아 이 엘리트들은 매콜리가 예언했듯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정부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커즌 시대에 대체로 사멸하고 장식용으로 남아 있던 토후들의 편을 들면서 그들은 무시 당했다.
5장. 맥심 총과 자본
2011년 4월 3일 일요일
오후 10:15
- 영제국의 지속적인 확대
- 독일 제국의 성장
6장. 경매에 붙여진 제국
2011년 4월 5일 화요일
오후 9:22
20세기 내내 영국의 지배에 대한 주요한 위협(그리고 그럴듯한 대안)은 민족 독립 운동이 아니라 다른 제국들이었다.
이 대안적 제국들은 영국보다 피지배 국민을 상당히 가혹하게 다루었다.
- 콩고 (벨기에 레오폴트 2세 치하) – 1000만 명의 인명 손실 (기아, 질병, 출산률 감소 등
- 알제리, 뉴칼레도니아, 베트남 (프랑스) – 체계적인 원주민 토지 몰수 정책
- 조선 (일본)
-
폴란드, 중앙아시아 (러시아)
영제국을 파괴한 것은 이들 제국 경쟁자들과 싸우는 데 든 어마어마한 비용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제국은 여러 세기 동안 피지배 국민을 억압했기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압제적인 제국과 불과 몇 년 동안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해체되었다.
1차 세계대전
독일의 전략
이슬람 세력이 영국과 그 동맹국에 대항하도록 만든다. 세계적으로 2억 7천만 이슬람교도 가운데 절반이 조금 못 되는 수가 영국, 프랑스, 또는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가정하면, 훌륭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영제국의 반격
세계 대전은 실행 불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로런스 같은 인물, 즉 비유럽 문화로 침투할 능력을 지닌 인간 카멜레온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을 창출하려면 몇 세기에 걸쳐 동양과 간계를 맺어야만 가능하다. 아프가니스탄의 수장을 향해 떠난 독인인들의 탐험은 해외에 나가 있던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독일의 패배
독일의 패배는 내부 요인이 아닌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세계적인 강국이 아닌 상태에서 세계적인 전투를 벌이려고 시도한 것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두 제국이 보유한 자원의 엄청난 격차를 고려하면, 영제국이 승리하는데 그토록 오래 걸린 게 수수께끼이다.
전쟁 비용
비용과 비교하면 이 새로운 영토들의 경제적 가치는 비록 마이너스는 아닐지라도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7장. 결론
2011년 4월 5일 화요일
오후 11:22
영제국의 공
저개발 세계에 대한 자본 수출
1996년에 세계 자본 총액의 약 5퍼센트만이 1인당 소득이 미국의 1인당 GDP의 20퍼센트 이하인 나라들에 투자되었다. 1913년에 그 수치는 25퍼센트였다.
민주주의의 확산
예전 영국 식민지였던 53개국 중 거의 절반인 26개 국이 1993년 현재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간접’ 통치 지역에서 영국의 통치가 협조적인 엘리트의 형성을 지원했던 방식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역할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들은 아프리카와 카리브 해 일부 지역에서 정치적 자유에 대한 서구식 열망을 고무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배울 점
탈제국 시대
- 경제적 세계화
경제적 성장은 이루었으나 그 과실은 매우 불공평하게 분배되었다.
- 정치적 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