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와 논리실증주의를 논하라.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로 대표되는 사상과 완전한 체계를 갖추기 전의 후기 사상(중기 비트겐슈타인이라고도 불리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과 논리실증주의를 비교하고 비평한다는 것엔 무리가 따른다. 실제로 카르납 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그의 후기 철학 기반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 글은 논리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철학만이 아닌 그의 일관된 입장을 비평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거름 위에 빈 써클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둘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컸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의 교조주의적 주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단정짓고, 통일과학을 수립하려 들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모든 참인 명제들의 집합이 곧 과학
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긴 했지만, 그는 오히려 반과학주의자였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는 <논리철학 논고>의 견해를 잘못 받아들이면서 수렁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이 경험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모든 형이상학을 부정했다고 이해한 듯 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오히려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들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윤리와 같은 형이상학의 가치를 옹호했다.
그들은 ‘과학’의 성공에 고무되어, 모든 철학의 문제를 귀납적 추리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20세기 초 과학의 수준을 고려해봤을 때 충분히 그럴만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1915년에 발표됐고, 인간의 과학 지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해 나갔다. 이때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검증된 경험적 지식이 서로를 지지해주는 과학 체계가 점점 커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언젠가는 세상의 모든 비밀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자, 아니 당시의 낙관주의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첫째, 과학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간다고 믿었다.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은 하나의 세계관일 뿐이며, 점진적이기 보단 혁명적으로 발전한다고 말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는 패러다임 전환의 사례이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주장이다. 세계관의 전환이라는 관점은 경험적 사실이 누적될수록 세계를 더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실증주의의 믿음을 거부한다. 적어도 토머스 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논리실증주의는 20세기 초의 물리학 세계관 내에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선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보다는 러셀이나 과거 철학자들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들은 과학이 세상에 대한 ‘일반적으로’ 설명을 제시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세계관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과학 발전을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일반성에 대한 갈망’을 부정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철학적 탐구>로 이어지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논리실증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의미검증이론이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는 점이다. 한때 비트겐슈타인 역시 진술의 의미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 고민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입장을 바꾸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검증이론을 방어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 말은 하나의 낱말이나 문장의 사용을 명료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 중의 한가지일 뿐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 ‘틀렸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론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틀린 것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가? 논리실증주의자라면 던질만한 의문이다. 일반상대성이론과 만유인력법칙은 거시 물리세계를 잘 설명한다. 둘 다 혜성의 공전주기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해낸다. 그러나 만유인력법칙은 태양 주변에서의 빛의 진로를 예측하지 못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이 세상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안겨준다는 점에서 만유인력법칙은 틀렸다. 그러나 동시에 자동차 충돌의 영향을 예측하는데 일반상대성이론은 필요 없다. 뉴턴의 법칙만으로도 충분하고, 그 편이 훨씬 간단하고 명료하다. 한정된 세계를 잘 설명한다는 점에서 뉴턴의 법칙은 유효하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놀이’를 통해 주장했던 바와 일치한다. 언어 자체는 서로 다른 많은 유형의 언어-놀이들이나 그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러한 구성 부분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현대 분석 철학>, p. 510, M. K. 뮤니츠)
아마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최대 실수는 과학적 지식의 검증가능성에 대해 맹목적으로 집착했다는 점일 것이다. 형이상학적 믿음의 비합리적인 교조주의를 비판했으면서도, 자신들의 검증이론에는 왜 집착했는지는 의문이다. 검증이론 자체가 검증되기 어려운 것을 알았다면, 땜질 처방을 내리기 보다 새로운 관점이 없나 탐구했어야 옳았다.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은 논리실증주의보다 훨씬 유연하다. 비록 완전한 진리는 아니더라도, 아직 반증되지 않은 가설의 총합으로써 과학을 바라볼 수 있다. 또는 토머스 쿤처럼 패러다임 전환의 관점에서 과학을 설명할 수도 있다. 둘 다 형이상학적 총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비트겐슈타인 식의 다양한 관점을 수용한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하나의 언어놀이이고, 반증되지 않은 가설은 또 하나의 만유인력법칙이다.
교조주의적 미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엄밀한 과학으로 채우려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훌륭했고, 시도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논리실증주의는 현대 과학 철학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나 고인이 된 칼 세이건과 같은 과학자는 종교와 미신을 반박하는 데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있다. 그들의 시도가 완전한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지만, 보다 합리적인 세상으로 가는데 밑바탕이 되리라 믿는다.
벌써 썼넹.
좋겠다. ^^;
아까 말한 “흄의철학”이 “데이비드 흄 저/황필호 역 | 철학과현실사 | 2003년 04월” 맞아?
yes24에 두권이 있길래 그냥 이걸로 주문했거등.
맞겠지? ^^;;;;
헉,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 이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