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 관리를 못하는 조직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올해 상반기 공무원 인건비를 실제보다 17조 원이나 많은 28조 원으로 계산하는 바람에 재정경제부가 망신을 당했다. 지난 9월 첫째 주에 보도가 된 것으로 알고 있고, 내가 이 사실을 파악한 건 류한석씨가 쓴 글을 통해서였으니 9월 12일이었다. 대선주자 경선이라던가, 학력 위조 사건 등 큰 일이 연달아 터져준 덕분에 이 개망신이 크게 부각되지 않고 넘어갔으니 재정경제부 입장에선 천만다행이랄까?

한데 오늘 9월 24일자 한경비즈니스를 펼치니 이 사건을 다룬 기사가 있었다. 어지간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속이 뒤틀리는 대목이 있어서 또 욱했다.

재경부와 예산처가 한목소리로 프로그래머의 실수를 오류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일부 언론이 기사에서 ‘삼성SDS 컨소시엄’을 언급하자 이 회사는 “재정수지 프로그램의 유지 보수는 컨소시엄 참여회사 중 하나인 H사가 전담하고 있으며 삼성SDS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참고. 나름 공정을 기하기 위해 기사에 등장하는 H사가 어디인지 찾아서 밝히자면, 현대정보기술이다.

지난 봄,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SI 업체의 중역이 와서 세미나를 맡은 적이 있었다. 화려한 PPT를 만들어서 사회 경험이 부족한 순진한 전산학도를 살살 꼬여 넘기는 걸 보고 혀를 찼었는데, 만약 그 PPT 만큼만 제대로 품질을 관리했더라면 이런 일은 안 겪었을 것이다. 괜히 프로그래머 탓해봐야 제가 못난 걸 강조할 뿐이다. QA 조직은 겉멋으로 만들어놨나? 밖에 나와선 품질 관리를 소리 높여 강조하더니만, 이래서야 체면이 안 서지 않나? 무엇보다 좀 인간답게 살만한 회사 환경 좀 만드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국내 SI 업체에서 일해본 사람을 여럿 만나봤는데, 단 한 명만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대답했다. (그 사람이 일했던 회사는 국내에서 일곱 손가락 안에는 들 것 같지만, 결코 세 손가락 안에는 못 든다.) 일은 하도급업체에게 맡기고 우리는 돈벌이되는 IT 컨설팅이나 하겠다는 회사라면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핵심 역량을 아웃소싱해놓고, 이런 사건이 안 벌어질 거라 다짐해봐야 믿음 줄 사람 하나 없다. 정면승부는 안 하고 허구한날 꼼수만 부리려 하니, 개발자 대우도 좋을 리 없을 수밖에…

SI 업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정부 조직은 왜 이리 리스크 관리를 못하는지 월급이 아깝다. 사실 정부 조직만 욕할 건 못 된다. 친한 선배가 컨설팅한 다년 간의 경험을 말해주곤 하는데, 일반 기업도 정부 조직보다 그리 낫다곤 못한다. 예전에 한 외국계 기업이 사용하는 리스크 평가 폼을 극히 일부만 공개한 적이 있는데, 이 정도 문서도 없이 대규모 시스템 계약을 내주는 조직이라면 정신 좀 차려야 한다. 실은 우리도 이 평가서를 받아 들고 당황했었는데, 여태까지 어느 기업도 이같은 서류를 제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서류 분량에 비해 우리가 버는 수익이 적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 기업들은 일을 체계적으로 하지 않는다. 조직의 역량을 차근차근 쌓아나가기 보단 매번 바퀴를 다시 개발(reinventing the wheel)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보다 본질적으로 사람 중요한 줄 모르고 위계질서만 강조하는 탓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당신네가 잘못해놓고선 애꿋은 프로그래머를 탓하는 건 보기에 매우 안쓰럽다. 회식한다고 늦게까지 술 마실 시간 있으면 집에 일찍 돌아가서 책이라도 읽고 공부를 하시길 강력히 권한다. 수년 전에 받은 학위를 믿고 버텨봐야 곱게 봐줄 사람 없다. 애 키우느라 돈이 부족하다면, 회사 지원금을 타내보던가, 발품 팔아서 도서관에 가던가 알아서 해결하시길.

Buy me a coffeeBuy me a coffee

최 재훈

Kubernetes, DevSecOps, Golang, 지속적인 통합 등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 많다.
Close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