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점: 별 다섯 개
루시퍼 이펙트에 이어 평점을 남발하는 것 같아 별 하나를 뺐지만 별 여섯 개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대제국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천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인류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국가, 아니 문명이기에 로마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유산을 진지하게 다룬 책이나 매체가 의외로 많지 않다. 국내에 소개된 책 중에서 꼽자면, 어린 시절에 읽은 먼나라 이웃나라(일부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했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절판되어 요약본 밖에 구하기 힘든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그리고 카이사르 자신이 쓴 갈리아 전기 등 몇 권 안 된다. 물론 비잔틴 제국을 다룬 책까지 합하면 훨씬 많아지겠지만, 로마 제국의 가치에 비하면 쓸만한 책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항상 아쉬움이 남았기에 이 책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가뭄에 단비 같이 반가웠다. 사학자가 쓴 글이니 만큼 역사적 사실(역사적 사실이 곧 진실인 것은 아니지만)에 충실한 점이 마음에 든다. 대중서임에도 출처를 정확히 명기했고, 역사가 사이에 논란이 있는 부분이나 역사서 간에 차이가 있는 부분을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이처럼 학자다운 신중함을 보여주면서도 대중서 답게 이야기를 쉽고 빠르게 풀어나가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8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읽는 내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번역 작업이 안 그래도 늦어져서 마음 졸이는 와중에 이 책 때문에 날려먹은 시간을 생각하면 무서울 정도다.
로마사가 흥미로운 이유는 로마인들의 사고 방식이 매우 실용적이고, 그들이 남긴 사료에 그들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는 점이다. 로마 정치는 정당 정치가 아닌 개인 또는 가문 간의 경쟁이 주가 되었고, 무엇보다 명예와 이익을 쫒았다. 여기서 말하는 명예는 삼국지에서 보이는 허울 좋은 의리나 대의명분과는 약간 다르다. 로마인은 존엄, 경건, 역량을 로마 정신의 정수로 보았으며,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을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는데, 이것이 로마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감추기보단 드러내는 것. 드러내는 행위가 치부가 되지 않는 것. 도원 결의만으로 평생을 믿고 의지할 사람이 생기는 삼국지를 읽다 보면, 그때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로마인의 역사가 치졸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도원 결의는 어쩐지 마피아의 맹세를 떠올리게 하고, 로마인의 역사는 끊임 없이 충돌하는 현대 국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 쪽이 낫냐 하면 역시 나는 헛소리할 자유조차 없는 마피아보다는 멍청한 국회의원이 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겉은 번지르하지만 실상 권위를 옹호하는 의리 같은 것 보단 때로는 더러운 시궁창 같은 냄새가 나는, 어떤 때는 피비린내가 나는 욕망이 좋다.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다른 사람의 욕망을 이해할 때 비로소 타협의 여지가 생긴다).
로마의 전쟁 수행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가볍게 백만 대군을 동원하는 삼국지에선 모든 게 화려하다. 제갈공명이 기획한 적벽대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그에 비해 로마군의 전술은 참 지루하다. 적군을 사로 잡아 고문하고 정보를 캐내어 적의 약점을 노리고, 상대보다 유리한 지형을 찾아 선점하며, 전력의 상당 부분은 예비대로 두어 전황에 맞춰 움직인다. 그야말로 고리타분한 교과서 같다. 게다가 로마의 전쟁사를 보면 참 가소로운 것이 전성기 때조차 기껏해야 군대 규모가 20만 정도 밖에 안 된다. 백만 대군끼리 맞붙는 삼국지에 비하면 참 서민적이다. 로마의 전쟁사는 사실 이보다 더 지루하다. 군대에 지급할 자금을 구하고, 보급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 부분에 대한 묘사를 읽다 보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병참 공부를 하는 것 같을 정도다. 정작 하이라이트라할 만한 전투에 대해선 쥐꼬리만큼 다루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지루한 면에 충실했기 때문에 로마가 살아남아 견고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로마인의 사고 방식과 정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된다. 카이사르의 군사적, 정치적 재능과 업적은 그야말로 로마 역사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 문명이 현대에 어떤 유산을 남겨주었는지 알고 싶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로마인 이야기 4,5권을 세번은 읽은것 같습니다. ^^
혹시 로마인이야기도 읽어보셨다면 시오노 나나미가 아무래도 정통사학자는 아니다 보니 흥미본위의 책이기는 합니다만 그차이는 어떤지 궁금하네요?
로마인 이야기는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씀 드리기 힘들겠네요. 말씀하신대로 저자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던 탓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약간 역사서보단 소설 같다는 인상을 받아서 말이죠. 실제로 읽어보면 제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