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만보에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6줄, 7줄씩 되는 문장이라면 어떻습니까? 실용적인 글이라면 잘게 쪼개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해줘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분도 많던데요.
내가 물었다.
내가 쓴 번역한 글 봤죠? 3장짜리 문장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번역할 수 있어요. 글에는 기승전결이 있는데, 문단이나 문장에도 기승전결이 있어요. 작가의 의도에 따라 번역해야지, 마음대로 쪼개는 건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 그런 건 핑계일 뿐입니다.
안정효씨는 단호했다. 뼛속까지 철저한 직업 의식이 스며들어 완고하다 싶을 정도였다. 40년 경력이 헛것이 아니었다. 작은 체구와 달리 정신은 강렬했다.
스케이트 타는 법을 배우는 첫날엔 아이스링크 외벽을 잡고 걸어도 미끄러져 넘어질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러던 것이 겨울이 지나 폐장할 무렵이 되면 눈 감고도 타게 된다. 누군가와 부딪힐 걱정만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경험이 쌓여갈수록 어려워지는 일도 있다. 칼럼리스트로서 글 쓴지도 일년이 넘었는데 글쓰기가 어렵다. 혼자 고민해선 머리 속만 복잡해져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몇 달 새에 글쓰기나 번역에 관한 책을 네, 다섯 권이나 샀다.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책이 안정효씨가 쓴 글쓰기 만보였다. 아니, 글쓰기 만보이다. 한 달이 지나도록 마지막 쪽 근처조차 구경 못했으니 말이다. 이토록 만만찮은 책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손 닿는 곳에 놔두고 내킬 때마다 읽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다 보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안정효씨 강연 포스터를 봤을 때, 기회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를 만나면 글쓰기 만보도 속보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작가를 초청한 학교 입장에서야 영어로 글쓰기에 대해 한 말씀 듣고자 했겠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글쓰기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영어든 한국어든 글쓰기 원칙은 그리 다르지 않다.
작가가 강단에 올라섰다. 웬 키 작은 노인이 나타났다. 문장을 통해서만 작가와 접했던 터라 할아버지 작가일 줄 생각도 못했다. 어릴 적엔 하얀 전쟁이 서재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40대 중반의 작가일거라 생각했다. 60대의 노인이라 하기엔 너무나 정정했지만, 내 머릿속 이미지와는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다.
작가의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체나이로는 20년은 젊을 터였다. 외모엔 ‘아, 작가란 이런 사람이구나’ 싶은 경륜이 묻어났다. 한마디로 직업 작가이자 번역가다웠다. 메모해 놓은 글을 읽을 때마다 안경을 꺼내 들지 않았다면, 작가의 나이를 실감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대체로 강연은 쉬웠다.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라던가, 문장 구성의 원칙이라던가, 모두 경험과 타인의 저서로부터 체득하고 익혔기 때문이다. 실천은 별개의 문제라 하더라도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 장면, 절대 잊지 못할 순간이 있었다.
작가는 창의적인 글쓰기에 대해 말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발 아래에 눈길을 줬다. 바닥에 뭔가 묻어 있나, 아니면 단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는 걸까? 잠깐 생각하는 새에 작가는 몸을 숙이더니 구두를 벗었다. 돌멩이라도 들었는지, 발이 가려웠는지 잠시 벗었다 다시 신었다. 그게 끝이었다.
방금 내가 신발 벗는 걸 봤죠? 무슨 생각했어요? 이게 강연의 일부라곤 생각 못했을 겁니다.
작가가 말하길, 글쓰기를 잘 하려면 뻔하게 나가선 안 된다고 했다. 처음부터 독자가 예상 못한 방식으로 주의를 끌어야 한다 했다. 자신이 신발을 벗었던 것처럼.
신발만 벗는다고 제대로 글을 썼다고 할 수 없다. 벗기 전에 발 아래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을 것이다. 독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거란 힌트를 줘야 한다. 글 읽는 사람이 당황하지 않게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그게 강연의 백미였다. 글 쓸 때마다 구두를 벗는 장면이 떠오를 것 같다. 말이나 글은 쉽게 잊혀진다. 정보는 눈과 귀를 타고 전기 신호로 바뀌고, 이내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 특별한 경험이 수반돼서 신경 조직 간의 패턴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말이다. ‘구두’는 뇌 속에 각인되어 잊기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