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을 펼쳐 들었다. 3분의 1쯤 읽었는데 164쪽에 한 구절이 나와 100% 일치하는 정치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의라던가 겉모습이 중시되는 사회에선 이단에 가까운 사고 방식일 수 있겠지만.
이스라엘의 안보 공포가 때로는 극단적으로 비쳐졌다면, 그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정치를 도덕적 관점으로만 이해하려는 자유적 인본주의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극단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스라엘에서 나는 외국인 특파원들을 종종 만났는데,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완전한 정의를 요구하고 정치의 도덕성을 끝없이 외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비도덕적’으로 몰아붙였다.
이런 사람들과는 논쟁이 불가능하다.한편 예루살렘 유대인 지구의 가난한 오리엔탈 구역에 사는 내 우파 이웃들은 완전한 안보를 요구했다. 그들과도 논쟁을 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들의 주장은 철저한 도덕적 관점이 아닌 구체적인 실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후세인 국왕과 하산 왕자의 측근에 따르면, 이자크 라빈은 늘 평화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도덕성이 아닌 이스라엘의 군사적 이익에 국한시켰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은 그를 신뢰했다고 한다.) 가장 건강한 의미에서의 사욕이란 상대방의 사욕도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하며, 그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타협의 여지도 생기는 것이다. 경직된 도덕적 입장만 고수해서는 타협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이 이스라엘에서 얻은 내 교훈의 일부였다.타타르로 가는 길 중에서
저와도 딱 맞아 떨어지는 관점이군요.
사실 공허한 명분만 떠드는 몇몇에게 지쳐가고 있습니다.
왜 뛰어난 영업사원을 보면, 제품 카탈로그를 고객에게 들이대기 보다는 고객의 이야기부터 침착하게 들어보지 않습니까. 세속적 정치를 유연하게 해 나가려면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상대가 정말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야겠죠. 자신의 생각은 자신이 잘 알고 있을테고, 우리에게 부족한 정보는 다른 이의 욕구가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상대방 자신도 스스로가 진실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으니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보니 회사 앞 아파트 단지에 현수막이 걸려 있더군요. 단지 앞 공원에 쇼핑몰이 들어설 모양인데, “외국계 기업만 배풀리는 xxx 기업은 각성하라”식의 구호가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바라는 바는 민족주의적 구호와는 달리, 교통정체, 집값 하락 등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주민이 민족주의자라고 착각하고 협상을 하면 안 되겠죠. -_-
자신의 생각이 절대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절대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절대선이라고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이도 있고,
진짜로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대화는 “내가 모르거나, 내 생각과 다른 곳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올 수 있게” 함으로써 시작되죠.
중학생인 제 동생 보니까 요즘은 영어, 한문, 그리고 중국어까지 공부하는 듯 한데, 그런 것 보다는 토론이나 에세이를 쓰는 시간이 늘어나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자신도 고집이 강한 편이고, 동아시아권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더 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다른 이의 이익과 접점을 찾는 교육이 전무하다는 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