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인가?
콰인은 말했다. 분석적 언명들과 종합적 언명들 간의 경계선은 그렇게 간단하게 그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경계선이 그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경험주의자들의 비경험적인 독단이며,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신조이다.
(『현대 분석 철학』 참조) 『경험주의의 두 독단』과 『원초적 번역의 불가능성』은 분석성 개념에 의존한 철학적 탐구가 유효하지 않음을 밝히는 논문이었다. 자신이 진리를 밝혀내고 있다고 믿는 이라면 발끈할만한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콰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논리실증주의자 등)의 바램처럼, 자연과학은 본질을 다루는 것일까? 그리고 철학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지난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에 던져진 한 질문이 생각난다. 전자라는 존재를 믿습니까?
자연과학을 10여 년이나 가까이 해 온 학생은 너무나 예상 가능하게도 ‘당연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자연과학사를 가만히 지켜보면, 전자와 원자의 개념은 항상 동일하지는 않았다. Atom. 이것은 깨어지지 않는 물질의 최소 단위였다. 그러던 것이 원자가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쿼크를 말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반증이 쌓이면 다시 검토해서 이론을 수정하는 것이 자연과학이다. 바로 그 점이다. 논리실증주의자의 바램이나 믿음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진리이다. 그러나 물리학조차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리학이 ‘이야기’ 이상일 수는 있다. 하지만 기존의 믿음처럼 그것을 증명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이번엔 철학, 물리학과 더불어 학문의 발전을 이끌어온 수학에 대해 말해보자. 논리실증주의자뿐만 아니라 KAIST 같은 과학자 또는 공학자 집단 내에는 ‘수학’이 선험적 지식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1931년에 쿠르트 괴델은 두 개의 정리를 발표했다. 첫 번째 정리를 요약하자면, 수학은 참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명제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수론 만큼이나 단순한 형식 체계가 도출하는 명제들이 아무리 정확하고 의미심장하며 확실하게 참인 것 같아도, 이것들을 형식적인 수단에 의해 증명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당신 인생의 이야기』
1+1 = ? 초등학교 수학이다. 하지만 1+1이 2가 아니라는 것을 보증할 어떠한 수단도 찾지 못했다. 초한귀납법이라는 의심스러운 방법을 제외하곤 이 문제에 진지하게 대답한 논문이 있었던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수학의 토대가 약함을 지적했지만, 이것이 곧바로 수학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아직 수학의 명제가 틀렸다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된 바가 없다.
분석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마당에 무엇에 의존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분명한 사실이 있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더라도 자연과학의 힘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무당에게 찾아가는 사람이 있고, 공인 받은 의사를 만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행동의 일반적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지성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 전자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자연과학의 힘은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기 보다는 오히려 예측 가능성과 실용성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과학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강철로 만들어진 배가 물 위에 뜨고, 기계가 하늘을 날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있었고, 실제로 증명해냈다. 비록 자연과학과 수학이 진리를 말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 분야가 희랍신화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있다.
콰인의 자연주의는 현실에 대해 보다 분명한 해석을 내놓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배경언어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콰인은 크게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보수주의의 원칙은 ‘가급적이면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적인 틀에 적은 변화를 가져오는 배경언어’를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단순성의 추구는 ‘배경언어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단순성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지난 리포트 『프레게와 러셀, 프레게를 옹호하며』에서 밝혔듯이, 오캄의 면도날 원리는 적용하기에 따라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다. 최초의 두 가지 선택 가능한 안 중에 보다 간단한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앞선 의견보다 보다 간단한 설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최초에 매력적인 선택이 곧 이어 그렇지 않다고 밝혀진다.
또 하나의 문제는 ‘단순성’이 무엇을 말하느냐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예가 실려 있다. 인간은 인과성을 기반으로 사고한다. 페르마의 원리를 증명하기 위해 인간은 변분법과 같은 수준 높은 수학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적(同時的)인 의식 양태를 가진 종족이 있다면, 그들에겐 ‘광선이 취하는 경로는 언제나 최소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라는 원리가 하나의 공리일 수도 있다. 그들에겐 오히려 속도의 개념을 말하기 위해 고도의 수학적 테크닉이 필요할지 모른다.
콰인의 기본적인 가정, 아니 분석철학의 토대는 ‘언어’가 세상을 보여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라는 믿음이다. 서로 다른 감각기관과 두뇌를 가진 인간을 묶어주는 하나의 공통 요소로써 ‘언어’의 가치는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가 철학적 토대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인양 이론을 구축해나가도 되는 것일까?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고 야생에서 자라난 아이가 빨강과 파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본질을 드러내는 하나의 양태에 불과하다면 분석철학은 출발점을 잘못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양태를 통해 다시 본질을 논한다면 순환오류가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모든 경험주의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콰인의 자연주의 자체를 공박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토머스 쿤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 과학철학의 시류와 일치하는 면이 많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콰인의 견해는 자연주의라기보다 실용주의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그의 철학은 어떠한 필연성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나마 실용주의적 태도라고 말하는 것조차 근거가 희박하다. 이래서야 철학이 한낱 제 취향 끼어 맞추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콰인에 이르러 ‘언어’에 의존하는 분석철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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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분석 철학』 M. K. 뮤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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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