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특의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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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 last modified:May 13, 2006

내 블로그에 오랫동안 방문해 주시는 분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직접적으로 회사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자제한다. 단 한차례도 현재 회사의 사명을 언급한 적이 없을 정도다. 회사 이름을 아는 친구도 서너명 밖에 되지 않는다. 가끔 너무 화가 나서 회사에 대한 불만을 글로 쓰기도 했지만, 바로 지우거나 비공개로 바꿨다.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나는 산업기능요원이다. 목표의식도 없이 학교에서 방황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학사 병특을 하기로 결정했었다. 결단을 내리면서 친구/선배의 사례를 쭉 살펴봤다. 별의별 아니꼬운 일이 있어도 참고 나가리라 다짐했다.

그 후로 약 2년 반 정도가 지났다. 현재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인사한지 2년 1개월째이고, 다음 6월말까지만 근무하기로 결정됐다. 소위 말하는 말년이다. 그러나 전의 병특 대다수가 그랬듯이 평탄치 않은 생활의 나날이다.

어제 아침이었다. 메일 한통이 날아왔다. 징계위원회가 열린다고 한다. 짐작가는 바가 있다. 이틀 전에 연구소 A이사와 언쟁을 높이며 싸웠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메일에 적힌 사유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 회의시 잦은 욕설로 … 위화감을 조성하고…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언제 욕설을 했다는 것일까?

하기사 이런 일을 내가 처음 당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꽤나 자주 발생했던 일이다. 특히 병특이 퇴사할 시기가 되면, 현금으로 챙겨줘야 하는 포인트를 깍기 위해서, 또는 말 잘 듣게 길들이기 위해서, 그도 아니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지어내곤 했다. 이번에는 첫번째와 두번째 이유일 것 같다.

징계위원회에 불려가면 이런 식의 처리에 대해 한마디 하리라 다짐했다. 그동안 못했던 말을 토해낼 찬스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아이리버의 녹음 기능을 켜 놓았다. 첫번째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사장실에 들어서니 최재훈 사원은 밖에서 기다려.라고 한다. 점심시간인데도 호출이 없다. 15분쯤 더 기다려보다가 사장실에 다시 가봤다. 이런 불이 꺼져 있다. 말 한마디 없이 A이사를 비롯한 경영진은 점심 먹으러 갔다. 하긴 이것도 여러 차례 있어왔던 일이다.

오후 5시가 되었는데도 아무 말이 없다. 팀장에게 메신저로 계속 기다려야 되는지 묻고 있는데, 메일이 도착했다. 이런! 징계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졌다. 1개월 감봉과 함께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복무만료 하루 전이라도 해고할 수도 있다고 협박한다. 결국 소명 기회도 없이 내가 욕설을 난무하는 인간이라고 단정된 것이다. 언성을 높인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했던 팀장도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A이사가 메신저로 말을 건다. 회의 좀 하자고 한다. 좋다. 도대체 이런 엉터리 결정을 자신들끼리 내린 것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회의실에 도착하니 A이사가 먼저 말을 꺼낸다. 연봉협상 시기가 지나서 지금 하려고 한단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다. 원래 우리회사는 연봉협상을 1월에 하기로 되어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아니란다. 입사일에 맞춰서 하는건데 내 경우엔 1개월 늦어졌다고 한다. 내가 신입사원도 아니고, 그런 거짓말에 넘어갈 것 같은 줄 아나보다. 작년에도 1월부터 연봉협상이 시작됐었다. 금년에 네다섯명 빼고 연봉협상을 하지 않아서 사원들의 불만이 충만한 상태이다.

처음부터 말꼬리를 잡으면 본론이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새로운 연봉을 보니 의도가 뻔히 들여다 보였다. 법정최저임금만 기본급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항목은 빠졌다. 강제로 하루 한시간씩 연장근무하던 것도 빠졌다. 당직이나 연장근무도 하지 말란다. 퇴직금을 줄이겠다는 수작이다. 이건 한번 당해보라는 뜻이다.

아마도 경영진은 나를 바로 해고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번의 김모군처럼 책상 서랍 안이 정리가 안 되어 있다며 해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의 중요한 시스템을 내가 혼자 장악하고 있을테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매달 하루 토요일에 근무를 명할 수 있다는 항목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 너가 안 오는 게 이쪽도 좋지. A이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달 전체 워크샵과 다음달 행사 모두 참여 안 해도 된다는 뜻인가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래. A 이사가 말했다.

이 조건은 마음에 들었다. 회의 내용을 녹음하고 있었기에, 혹시나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면 증거로 삼을 수 있었다. 안심이 됐다.

이로써 연봉협상은 끝이 났다. 첫번째 연봉협상 때는 월급이 만원 정도 올랐었다. 그래서 간신히 80만원 대를 탈출했다. 금년 초에는 연봉협상도 안 하고 휴가일수가 1년 기준으로 10일 정도 줄어서 사실 상의 연봉 삭감이 이뤄졌다. 거기에 이제는 최저임금만 받으란다. 62만원. 참, 웃기는 곳이다.

P.S. 병역특례면 입대하는 것 보다 낫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용주가 해고를 무기로 협박하면 들어줘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해고를 당하면 그동안의 복무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당한 해고의 경우에는 참작이 된다고는 하지만, 법정으로 가서 부당함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이런저런 문제로 병무청에 전화해보면 도와줄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직접적인 복무규정위반에 해당하는 몇몇 경우만 해결해 줄 수 있다면서, 나머지 사안은 다른 정부부처에 문의하라고 한다. 도대체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건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건지 구분이 안 된다. 이러니까 주변에 해외로 떠나겠다는 사람을 심심찮게 보는거다.

일부에서는 군대 가는 것보다 나으니까, 고맙게 생각하라고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중요한 것은 제도가 합리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지, 누가 더 편하게 생활하고 있느냐가 아니다. 이런 일을 몇 차례 지켜보고, 직접 당하면서 이 나라에 대해 갖고 있는 일말의 애정도 식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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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bernetes, DevSecOps, AWS, 클라우드 보안, 클라우드 비용관리, SaaS 의 활용과 내재화 등 소프트웨어 개발 전반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하세요. 지인이라면 가볍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저의 현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협의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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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ogue
17 years ago

저는 5년 꽉꽉 채워(과거에는 하루도 에누리 없었습니다) 병특 마친 선배(?)로서 조언(뭐 크게 조언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한 마디 안 할 수 없네요.

“영광의 그날이 올 때까지, 꿋꿋하게 참을 인자 쓰면서 기다리세요.’

뱀다리) 아직도 이런 구둣발 정신으로 운영하는 회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 jrogue

짱똘
17 years ago

심하군요. 요즘도 이런 회사가 있나요?? 예전에 산업기능요원으로 가면 별의별 아니꼬운걸 다 참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긴했는데. 그거 못참고 때려치고 그냥 군대 간 사람도 봤습니다. 하지만 그거야 10년도 더된 옛날 이야기인데 지금도 그런가 보군요.
님을 보면 전 직장 동료들은 천국(?)에서 일한거군요. 월급도 일반 직원이랑 같고 뭐 병특이라고 딴지거는건 거의 없었거든요. 뭐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다보니 좀 억울한 면도 없지 않지만(그당시는 2(3)년까지 직장을 옮길수 없는 규정이 있어서).
어째든 이제 몇개월만 버티면 되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화내면 화낸사람만 병나거든요(화병). 가능하면 회사일에 신경 끄시고(그게 쉬운일은 아니죠)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해보세요. 가능하면 몸쓰는거로요. 땀빼고 나면 기분이 좀 풀리거든요.

ansys
17 years ago

좀 비겁한(?)것 같지만 군대생활이라 생각하시고 얼마 안 남은 기간이니 이겨내세요. ^^
화이팅입니다!

kebie
kebie
17 years ago

부대에서는 영창을 보내느니 휴가를 잘라버린다느니 하며 여러번 협박당해가며 야근도 하고 근무취침도 못해가며 지낸 적도 많습니다. 실제로 휴가도 몇번 짤리고 8개월 이상 부대에서 썩은 적도 있었죠… (휴가 자주나가는 녀석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부대나 밖이나 그런일은 항상 있는 것 같네요… 어느 상황이 더 견디기 힘들다고 말하는 건 당해본 사람도 쉽지 않겠죠… 어딜가나 그들만의 고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건강히 복무마치시길 빕니다. 수고하세요.

최재훈
17 years ago

to jrogue4, 짱똘, ansys8: 네, 참을 인자 수백번씩 그으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제가 입사할 무렵에는 병특 가능한 회사 중에서는 괜찮은 편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망가지네요. 제대로 근무한 최초의 회사인데 이렇게 되어 버려서 감정이 복잡합니다. 한달 반밖에 남지 않았으니,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업무인수인계만 할 생각입니다.

to kebie10: 솔직히 현역보다는 이 생활이 쉬운게 사실이죠.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이 이 제도의 불합리한 점을 무시해버리니 문제입니다. -_-

제루
제루
17 years ago

회사 분위기와 오너의 마인드에 따라 달라지는거라지만, 정말 안좋은 경우인 것 같네요. 힘내세요.
전에 병무청에서 교육받기를 대체로 대체복무 당사자의 손을 만이 들어준다고 했었는데, 한달 반이라도 좋은 길 있으면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최재훈
17 years ago

복무하면서 대체로 병무청의 도움을 받으려면 다른 병특 중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병무청에 신고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_-

프리버즈
프리버즈
17 years ago

제 주변에도 고생하는 병특들이 많아서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저도 몇달 후에 전문연을 시작해야하니 더욱..-_-

최재훈
17 years ago

to 프리버즈: 전문연구요원의 경우는 좋은 회사가 많아서 조금만 열심히 알아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석사과정하는 제 친구도 전문연구요원으로 일하려고 설명회 돌아다니고 있더라구요.

한지영
한지영
17 years ago

지금이야 어떻게든 예비군 연기해볼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지만 네 글을 보니 나도 병특시절 시달렸던 기억이 방울방울 나는구나. 회식떄 프로젝트 매니져한테 ‘한지영씨는 병특이 실수하면 머리박아야지’ 라는 말을 듣고 바로 전직 했었는데. 병특 3년동안 2번의 전직을 했으니 사실 병특생활이 말처럼 쉬운게 아니라는거 공감한다. 그래도 말년이니 힘내라!

최재훈
17 years ago

땡큐. 땡큐. 원래 연봉협상하면서 업무인수인계 외엔 다른 일을 받지 않는다고 약속 받았는데,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기술을 보유한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신규업무까지 떠맡게 됐지. 그렇다고 대우가 다시 좋아진 건 아니지만 이제 건드리지는 못해. 나름대로 편해졌다고 할까? 하하.

김무개
김무개
17 years ago

제 경우도 회사 병특취소한다고 협박해서 시달리며 일하다 나왔는데

10개월이 다되어가는 지금도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당할수 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라고나 할까요…

전 모범사원의 모습을 만들어서 제 자신을 숨겼지만 나중에 괴롭더군요.

세상엔 참 나쁜놈들이 많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단 꼬투리 잡힐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마시고…

ㅎㅎ 제 경우는 퇴근후에 검도장에 가서 대련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최재훈
17 years ago

아, 7월 중순에 의무종사기간이 끝났고 복학했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