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특의 설움

내 블로그에 오랫동안 방문해 주시는 분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직접적으로 회사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자제한다. 단 한차례도 현재 회사의 사명을 언급한 적이 없을 정도다. 회사 이름을 아는 친구도 서너명 밖에 되지 않는다. 가끔 너무 화가 나서 회사에 대한 불만을 글로 쓰기도 했지만, 바로 지우거나 비공개로 바꿨다.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나는 산업기능요원이다. 목표의식도 없이 학교에서 방황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학사 병특을 하기로 결정했었다. 결단을 내리면서 친구/선배의 사례를 쭉 살펴봤다. 별의별 아니꼬운 일이 있어도 참고 나가리라 다짐했다.

그 후로 약 2년 반 정도가 지났다. 현재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인사한지 2년 1개월째이고, 다음 6월말까지만 근무하기로 결정됐다. 소위 말하는 말년이다. 그러나 전의 병특 대다수가 그랬듯이 평탄치 않은 생활의 나날이다.

어제 아침이었다. 메일 한통이 날아왔다. 징계위원회가 열린다고 한다. 짐작가는 바가 있다. 이틀 전에 연구소 A이사와 언쟁을 높이며 싸웠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메일에 적힌 사유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 회의시 잦은 욕설로 … 위화감을 조성하고…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언제 욕설을 했다는 것일까?

하기사 이런 일을 내가 처음 당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꽤나 자주 발생했던 일이다. 특히 병특이 퇴사할 시기가 되면, 현금으로 챙겨줘야 하는 포인트를 깍기 위해서, 또는 말 잘 듣게 길들이기 위해서, 그도 아니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지어내곤 했다. 이번에는 첫번째와 두번째 이유일 것 같다.

징계위원회에 불려가면 이런 식의 처리에 대해 한마디 하리라 다짐했다. 그동안 못했던 말을 토해낼 찬스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아이리버의 녹음 기능을 켜 놓았다. 첫번째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사장실에 들어서니 최재훈 사원은 밖에서 기다려.라고 한다. 점심시간인데도 호출이 없다. 15분쯤 더 기다려보다가 사장실에 다시 가봤다. 이런 불이 꺼져 있다. 말 한마디 없이 A이사를 비롯한 경영진은 점심 먹으러 갔다. 하긴 이것도 여러 차례 있어왔던 일이다.

오후 5시가 되었는데도 아무 말이 없다. 팀장에게 메신저로 계속 기다려야 되는지 묻고 있는데, 메일이 도착했다. 이런! 징계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졌다. 1개월 감봉과 함께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복무만료 하루 전이라도 해고할 수도 있다고 협박한다. 결국 소명 기회도 없이 내가 욕설을 난무하는 인간이라고 단정된 것이다. 언성을 높인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했던 팀장도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A이사가 메신저로 말을 건다. 회의 좀 하자고 한다. 좋다. 도대체 이런 엉터리 결정을 자신들끼리 내린 것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회의실에 도착하니 A이사가 먼저 말을 꺼낸다. 연봉협상 시기가 지나서 지금 하려고 한단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다. 원래 우리회사는 연봉협상을 1월에 하기로 되어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아니란다. 입사일에 맞춰서 하는건데 내 경우엔 1개월 늦어졌다고 한다. 내가 신입사원도 아니고, 그런 거짓말에 넘어갈 것 같은 줄 아나보다. 작년에도 1월부터 연봉협상이 시작됐었다. 금년에 네다섯명 빼고 연봉협상을 하지 않아서 사원들의 불만이 충만한 상태이다.

처음부터 말꼬리를 잡으면 본론이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새로운 연봉을 보니 의도가 뻔히 들여다 보였다. 법정최저임금만 기본급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항목은 빠졌다. 강제로 하루 한시간씩 연장근무하던 것도 빠졌다. 당직이나 연장근무도 하지 말란다. 퇴직금을 줄이겠다는 수작이다. 이건 한번 당해보라는 뜻이다.

아마도 경영진은 나를 바로 해고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번의 김모군처럼 책상 서랍 안이 정리가 안 되어 있다며 해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의 중요한 시스템을 내가 혼자 장악하고 있을테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매달 하루 토요일에 근무를 명할 수 있다는 항목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 너가 안 오는 게 이쪽도 좋지. A이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달 전체 워크샵과 다음달 행사 모두 참여 안 해도 된다는 뜻인가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래. A 이사가 말했다.

이 조건은 마음에 들었다. 회의 내용을 녹음하고 있었기에, 혹시나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면 증거로 삼을 수 있었다. 안심이 됐다.

이로써 연봉협상은 끝이 났다. 첫번째 연봉협상 때는 월급이 만원 정도 올랐었다. 그래서 간신히 80만원 대를 탈출했다. 금년 초에는 연봉협상도 안 하고 휴가일수가 1년 기준으로 10일 정도 줄어서 사실 상의 연봉 삭감이 이뤄졌다. 거기에 이제는 최저임금만 받으란다. 62만원. 참, 웃기는 곳이다.

P.S. 병역특례면 입대하는 것 보다 낫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용주가 해고를 무기로 협박하면 들어줘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해고를 당하면 그동안의 복무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당한 해고의 경우에는 참작이 된다고는 하지만, 법정으로 가서 부당함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이런저런 문제로 병무청에 전화해보면 도와줄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직접적인 복무규정위반에 해당하는 몇몇 경우만 해결해 줄 수 있다면서, 나머지 사안은 다른 정부부처에 문의하라고 한다. 도대체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건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건지 구분이 안 된다. 이러니까 주변에 해외로 떠나겠다는 사람을 심심찮게 보는거다.

일부에서는 군대 가는 것보다 나으니까, 고맙게 생각하라고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중요한 것은 제도가 합리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지, 누가 더 편하게 생활하고 있느냐가 아니다. 이런 일을 몇 차례 지켜보고, 직접 당하면서 이 나라에 대해 갖고 있는 일말의 애정도 식어간다.

최 재훈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고성능 서버 엔진, 데이터베이스, 지속적인 통합 등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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