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거리는 시소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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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 last modified:April 26, 2007

알립니다. 이 글은 KAIST 전산학과 세미나 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어릴 적 살던 동네엔 놀이터가 많았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조성된 상계동에는 아이들이 항상 넘쳐났다. 초등학교가 모자라 새로 건물을 올릴 정도였으니, 놀이터가 많은 것도 당연했다. 평소엔 당시 유행하던 ‘들고까기’ 야구를 즐겼지만, 아이들이 없을 때는 놀이터에서 그네나 시소를 타곤 했다. 그런데 아이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할 때면 위험천만한 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시소 위에 올라 한쪽에서 반대편으로 걸어나가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별것 없다. 단지 좁은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간 지점이 다가올수록 들떠서 좀더 빨리 걸어나가게 된다. 마침내 한 걸음 더 내디디면 시소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지나온 자리가 솟아오르고 눈 앞의 세계가 기울어져 내려가는 게 보인다. 말 그대로 세상이 뒤집어 엎어지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건 흔들거리는 시소 위를 거니는 게 아닐까?’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강의실에 앉아 있자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 집에선 내가 법대로 진학하길 원했다. 2학년이 되어 이과로 진학하자 이번엔 의사가 되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램을 느낄 수 있었다. 근저에는 기술 고시 등을 보지 않겠냐란 이야기가 있었다. 누구나 힘들던 시절에 네 남매를 교육시켜 낸 할머니 세대나 일하느라 바빠서 정작 자신은 여가를 즐기기 어려웠던 아버지 세대가 소중한 자식이 대부호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사회 격변에 휩쓸리지 않고 편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전학 가거나 회사를 옮기게 되면 괜히 불안해진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다녔는데도 가끔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스치고 지나갈 때가 많다.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도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닌 듯 하다. 결혼과 자녀 교육, 사생활과 공적인 삶의 균형 맞추기 등 ‘진짜 인생은 지금부터’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불안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주변의 말 잔치에 따라 정해진 걸음을 나아가면 안전하리란 작은 희망을 품게 된다. 유수한 대학에 입학해서 좋은 학점 받고 졸업하여 높은 연봉을 받는다. 멋진 여자를 만나고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가면 더할 나위 없다. 남들처럼 사는 게 행복이 아닐까?

이래서야 인생이란 정말 별 게 아니다. 모범 답안이 있어서 누가 좀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느냐에 삶의 성공 여부가 달렸다. 야근을 밥 먹듯 해도 좋으니 연봉만 높으면 된다. 일년에 한번 미술관에 갈 시간이 없어도 괜찮다. 그보단 내 집을 장만하는 게 더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행복’은 없고, ‘성공’만 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거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서 남보다 10평 더 넓은 집을 사고, 자식들 유학 보내고, 고급 승용차라도 살 수 있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성공이란 곧 행복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논리 전개이다.

이 이야기의 끝은 이렇다. 사랑해서 결혼했을 텐데 집에 가면 마누라 잔소리나 들어야 한다며 자진해서 야근한다. 하루라도 내 집 장만하려고 잔업도 마다하지 않고 일한다. 그러나 거친 사회 생활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자리가 많아진다. 어느새 뱃살은 두툼해지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가도 그날 있었던 일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 아내나 자식들은 드라마를 보고 깔깔대지만 내가 있을 자리는 아니다. TV 시청료를 벌어오는 건 정작 나인데도 말이다. 정녕 이것이 내가 바라던 행복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연봉 높은 회사에 들어갔는데 운 좋게 마음에 맞는 동료와 만나는 것보단, 우선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있는 회사를 찾고 운까지 억수로 좋아서 연봉까지 넉넉히 받는 걸 원한다. 어쩌면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리는 아닐 거다. 훌륭한 사람들이 모이면 그만큼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테니 말이다. 한해 연봉을 몇 천 만원 더 주는 회사보다는 열심히 일하고 제때 퇴근할 수 있는 회사가 낫다. 마음이 지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없다. 좀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사람들 설득하느라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 일과 집안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 안 그래도 부족한 여가 시간에 지금 업무와 상관도 없는 다른 분야를 공부할 여유는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나오지만, 정작 내가 즐길 시간이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이런 관점에서 전산학 세미나는 제 방향을 잡고 있는걸까? 가끔 의구심이 든다. ‘전략’과 ‘생존 방법’은 충분했다. 그러나 ‘비전’은 어디 있었을까? 돈을 잘 버니 컨설팅을 해야 하는 거였나. 제랄드 와인버그로부터 내가 전해 받은 건 ‘소명’이었지, 살아남는 방법 따위가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재테크 기법이나 현란한 전문 용어 뒤에 감춰진 허황된 세계가 아닌 역할 모델이 아닐까? 10년이면 잘 나가던 대기업도 몰락하고,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 처량하게 옥살이를 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지금 각광 받는 분야라도 그때 가선 하찮아질 수 있다. 반대로 열악한 환경에 내몰려 사람이 부족해지자 다시 대우가 좋아지기도 한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가 최고였던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이제는 안정적인 공무원이 최고란다. 기대 수명대로라면 앞으로도 수십 년을 더 살텐데, 10년 뒤에 오늘자 신문을 꺼내 들고 최고의 직업이 어떻게 변했나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앞으로의 10년이 지난 100년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은 예측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게 변하는 듯 해도 중심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세상의 거센 파도에 흔들리긴 해도 휩쓸리진 않도록 나를 잡아줄 비전이라는 닻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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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bernetes, DevSecOps, AWS, 클라우드 보안, 클라우드 비용관리, SaaS 의 활용과 내재화 등 소프트웨어 개발 전반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하세요. 지인이라면 가볍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저의 현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협의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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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ps
17 years ago

와우~
수없이 많은 고뇌를 하셨겠죠…
저도 많은 고민끝에 얻은 결론과 비슷합니다. 완전히 같진 않지만요..

저는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있는 회사를 찾고 그 사람들과 재미있게 같이 일하며 운좋아 연봉도 더 받는 일이…. 철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려운일이라고 생각했구요..
그 대신에 작지만… 제가 그런 회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역시 어렵지만… )

ㅎㅎㅎ 더 철없는 소리인가요??
욕심을 버리고…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최재훈
17 years ago

와우, 꼭 성공하셔서 후학에게 좋은 역할 모델을 제시해주세요.

박승룡
박승룡
17 years ago

SAIT에서 랩을 맡고 있는 50대입니다.
우연히 들리게 되어 소명과 성공과 행복에 대한 고민을 보고 참견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몇 자 씁니다.(괜한 참견이란 생각도 드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젊었을 때 많이 들었던 ‘사람은 소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가 이제는 도덕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핵심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집니다. 역사를 짧게, 표면적으로 보면 성공 스토리가 난무하는데 사실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사실 소명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왔다는 어찌 보면 평범한 진리를 재발견하게 되지요.(재성씨가 소니의 몰락에 대해서도 언급을 이미 하셨지만…)
요새 SAIT에 지원하는 연구자들을 보면 너무 소명이라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느낌이 많아 마음이 편하지 못했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군요. 비전, 소명 이거 꼭 잡고 가십시오. 그런지 않으면 단거리에서 이길 수는 있지만 장거리에서는 안됩니다. 인생은 장거리 게임이니….

최재훈
17 years ago

괜한 참견이라니요. 조언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선배들이 충고해줘도 흘려 들었는데, 이젠 아무나 잔소리(?)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후에 부끄럽지 않게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