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박영숙, 호세 꼬르데이로
번역진 | 곽창규, 이종곤, 최혜원, 박세훈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에 감동 받고, 바로 트랜스휴먼 운동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레이 커즈와일은 스스로를 특이점주의자 또는 패턴주의자라고 칭하지만, 넓게 봐서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구글링을 해보니 한국에는 트랜스휴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이트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그물에 걸린 책이 한권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2020 트랜스휴먼과 미래경제이었다. 마침 석현이가 생일 선물을 사준다기에 이 책을 받아서 읽게 됐다.
트랜스휴먼, 즉 변환인간론은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인간의 진화를 추구하는 운동이다. 일부에선 유사 과학화된 사이비 종교로 변질된 면도 보이지만, 기본적으론 휴머니즘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일상적인 ‘인간’의 의미를 확대하기 때문에 외부 사람이 운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트랜스휴먼 학파에서는 사이보그, 복제인간,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지적 존재 모두를 아울러 인간으로 본다.
트랜스휴먼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아마도 수명 연장, 더 나아가 불사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한다는 점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종교인, 사상가 등이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살아갈 것을 역설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매우 이단적이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후쿠야마 프랜시스 같은 석학들은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한다. 어느 의견이 옳던 간에 이런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트랜스휴먼 운동이 가치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트랜스휴먼 학파는 기술을 적절히 사용해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World Transhumanism Association의 창립자인 닉 보스트롬은 옛날 옛적에 폭군 드래곤의 우화를 통해 진정한 윤리 강령이 무엇인지 역설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2020 트랜스휴먼과 미래경제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트랜스휴먼의 정의가 애매하고,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보는 관점도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인간관은 극단적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휴머니티는 본질적으로 인지적 능력의 여부에 근거한다. …… 더 엄격히 말하면 저능아, 로봇, 태아, 포유류의 포배, 인조 인간 등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들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 사실상 자궁에서 나온지 몇 달 안 되는 태아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라고 간주할 증거가 희박하다.
저자는 위와 같은 이성철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이 대목은 우생학을 떠올리게 해서 목에 묵직한 게 걸린 마냥 편치 않았다. 2장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이 인류애에 기초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이같은 주장을 펼치다니 실망스럽다. 역시 책에 소개된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발언에 나는 공감한다.
이성철학자들의 주장은 마치 다 성장한 어른 침팬지는 막 태어난 영아들보다 정신적인 인지력이 높으므로 이들을 죽이는 것이 막 태어난 영아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다라는 말과 같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인간’을 정의하려는 철학적 시도가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모든 트랜스휴머니스트가 저자의 인간관에 공감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트랜스휴머니즘이 인류 복지에 기여하려면, 기술을 넘어 철학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모순에 직면하게 될 여지가 상당히 많아 보인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실증주의 철학처럼 슬그머니 사그라들지 모를 일이다. 존경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씨가 트랜스휴먼 운동을 비판한 것도 이같은 잠재적 위험성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아쉬운 점
이 책은 대체로 유익하긴 하지만 특이점이 온다에 비하면 재미가 없다. 특이점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통계를 많이 인용하지만, 도표 없이 글로만 설명한다. 호세 꼬르데이로가 책의 상당 부분을 쓴 것으로 보이는데, 번역이 약간 실망스럽다. 어법이 틀린 곳이 많았고, Ayn Rand를 얀 랜드라고 소개한 부분 등 어휘 선택도 적절치 못했다. 이 책이 2006년에 초판 발행됐지만, 호세 꼬르데이로가 글을 쓴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 아닌가 싶다. 시험관 아이 등 일부 기술에 대한 묘사나 통계를 보면 시대에 뒤쳐진 느낌이 간혹 든다. 하지만 2004년도에 발표된 글을 인용하는 대목도 있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책 제목에 ‘경제’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그래서 앨빈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 식의 작품을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10장. 트랜스휴먼으로 진화하는 시대, 우리의 성공 대안에서 한국의 미래전략이 제시되어 있을 뿐, 책 대부분은 트랜스휴먼 논의로 채워져 있다. 경제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곤 할 수 없다. 트랜스휴먼과 미래전략 정도였으면 더 어울렸을 것 같다.
기타
책 발행란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이 책의 인세 수익금 전액은 비영리사단법인 유엔미래포럼에 기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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