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장기 휴가를 받은 셈이다. 2주가 넘게 쉬니 좋을 법 한데 여행 계획을 잡은 것도 아니고 느닷없이 찾아온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잡일 처리하느라 바쁘다. 조금 한가해질 듯 하면 자질구레한 일거리를 찾아내는데 오늘은 과거의 앨범을 뒤져 스캔하느라 바빴다.
앨범이라 하면 사진이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사진 찍길 싫어했던 고집쟁이라 졸업 앨범을 제외하면 정말 사진이 적다. 그나마 절반 정도는 작년에 큰맘 먹고 디지털로 바꿨기 때문에 더더욱 할 일이 없다. 오늘 하루를 투자함으로써 스캔하기 어려운 졸업 앨범 사진을 제외한 나머지는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됐다.
과거를 다시 돌아보니 지금과 다른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고 때로는 좋은 일 나쁜 일이 떠올랐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을 느꼈는데 즐거웠던 것만 남기려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이 좋아하는 연예인
이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와 연예인이 먼저 나온다.
- 잼 – 난 멈추지 않는다
잼의 난 멈추지 않는다는 내가 팝 음악에 빠지기 전에 좋아했던 몇 안 되는 가요 중 하나다. 기억이란 희미해지는 것인지, 꽤 빠른 곡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들어보니 느리다. 왜 이리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나만 그런 걸까?
- 노이즈 – 너에게 원한 건
노이즈의 너에게 원한 건은 내가 좋아한 곡이 분명하다. 당시에 엽서 모으기 취미가 있었는데 그 중에 낀 몇 안 되는 연예인 중 하나가 노이즈이기 때문이다(최진실, 서태지, New Kids On The Block 정도가 있었다). 그런데 노래는 친숙하지만 이상하게 이 노래를 즐겼던 기억이 없다. 두뇌의 일부가 허공으로 사라진 느낌이다.
초등학생의 이상형
요즘보다 성장이 느린 세대지만 6학년 때쯤엔 사춘기가 시작됐다. 이성에 관심이 많아질 무렵인데 어떤 짝꿍이 이상적인지는 아이나 성인이나 다를 게 없다. 우선 잘 생기고 예뻐야 한다. 그러고 나서 성격이나 유머 감각이 온다. 그나마 돈 많은 집 아이는 안 찾으니 어른보단 낫긴 하다. 어쨌거나 내 경우를 떠올리면 잘난 척하는 데다 착하지도 않아서 그다지 인기는 없지 않았을까?
야구 소년의 사춘기
이런 자리에 공개하기 힘든 자료라 내놓진 않지만, STAR CLASSROOM, Baseball Club Phone이란 문서가 있다. 좀 배우기 시작했다고 영어로 제목을 썼는데 완전 콩글리쉬다. 국민학생답다고 해야 하나?
STAR CLASSROOM은 남자 애들끼리 모여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애들을 뽑은 목록이다. 일종의 미스 6반 정도일까? 중학교 땐 남녀공학이었지만 분반이었고, 남자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여자가 많지 않은 공과대학을 들어간 내겐 6학년 때가 유일하게 운이 좋았다. 학교에서 인기 있는 여자애들이 죄다 6반에 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목록에 무려 8명이나 있다. 요즘도 연락하고 사는 친구는 한 명 뿐인데 오늘 이런 자료가 있다고 알려줬다. 문자로는 몰랐다고 하는데 과연 진실인진 나중에 만나서 물어볼 생각이다.
이 친구는 내가 누굴 좋아했는지 안다. 하지만 내가 그 여자애 사진을 꽤 찍어뒀단 사실은 모를 것이다. 잘난 척하고 다녀도 예나 지금이나 이런 문제엔 쑥맥이라 살짝살짝 찍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당하게 이야기해도 좋았을 걸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
중학교
중학교 땐 좋은 기억이 많지 않다. 학교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돌이켜보면 호르몬의 영향인지 나 역시 지나치게 민감했다. 감정을 못 이겨 폭력적으로 돌변할 때도 잦았다. 그래서 왕복 2시간 반이나 걸리는 경복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이 때문에 이 시기의 사진이 가장 적다. 기껏 대여섯 장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한때를 기록한 걸 찾았다.
교생 선생님과 찍은 사진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떤 분이었는지 떠오른다. 꽤 고통스런 시기였지만 나름 즐거운 일도 있어서 위안이 된다.
자매 고등학교
경복 고등학교는 진명여자고등학교 그리고 일본의 히메지 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기억으론 2년에 한번씩 경복고교와 진명여고를 번갈아 가며 행사를 치뤘던 듯 하다. 내가 이 행사에 참여한 건 아마 2학년 때였으리라.
사진을 보면 진명여고의 교복은 상당히 도도해 보인다. 내 어렴풋한 기억 속의 여학생들도 교복과 같은 이미지로 남았다. 하지만 당시와 달리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엔 여고의 진정한 모습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똑바로해이것들아!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격렬한 체육대회에 임하는 모습이라니! 그땐 상상조차 못했다.
선도부
이 사진을 찾고 깜짝 놀랐다. 내가 선도부였나? 어찌된 영문인지 너무 생소했다. 무지막지한 등하교 시간 때문에 외부 활동은 안 했다고 기억하는데 또 한번 사람의 기억을 너무 믿어선 안 된단 교훈을 얻는다. 그러고 보면 항상 첫 지하철을 타고 등교했으니 선도부 활동을 하더라도 특별히 빨리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이 희미해진 게 아닐까?
이쯤에서 정리하자. 그렇게 괴로웠던 시절도 사진에는 흔적도 없다. 사진 속엔 모두가 웃는다. 때론 뚱한 표정이 있어도 뜨거운 햇살 아래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즐거움만 남는다니 사람의 기억이란 참 편리하다.
저도 예전 일들이 많이 떠오르는데요..
경복고와 히메지란 이름을 듣고 반가와서 글 남기고 갑니다.
RE 아크몬드: 사진이 몇장 안 되는 게 못내 아쉽네요.
RE 홍가이버: 경복고 선배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