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브랜드 파이낸스(BF)사 2007 평가 보고서가 발표되자, 블로그나 언론 매체를 통해 여러 차례 인용되기 시작했다. 삼성이 32위로 올라섬으로써 체면치레를 했다는 데 다들 만족했다. 삼성의 기세가 나날이 치솟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해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소니를 추월했다
, 삼성과 소니, 엇갈리는 명암
식의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이젠 누구도 소니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소니는 도요타, 혼다, 캐논 등과 마찬가지로 일본 기업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소니는 글로벌 기업이지, 일본 기업이 아니다.) 소니의 위기가 가시화된지도 벌써 몇해나 지나서 그런지, 비교할 가치도 못 느끼는 듯 하다. 브랜드 파워도 60위 권으로 대폭 추락한 상황이다.
이런 때에 소니 침몰이 번역 출판됐다. 엔지니어에게 쾌감을 주는 책이라기에 냉큼 집어들었다. 우선 저자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야겠다. 미야자키 타쿠마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그는 소니 바이오 사업부의 기획팀에서 일했다. 하지만 기술을 중시하는 풍조에서 일해온 덕분에 엔지니어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저자가 엔지니어링에 발을 담근 기획자였기 때문에 경영과 기술 양 측면에서 소니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어서 좋다. 또한 얼마 전까지 소니에서 일했던 현장 실무자가 쓴 책이기 때문에, 분석이랍시고 제멋대로 헛소리나 지껄이는 여타 분석서와는 다르다. 내부인만 알 수 있는 회사 분위기, 사람들의 반응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호사가들은 소니의 부진과 삼성의 고공행진을 비교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두 기업을 비교하는 게 타당하지도 않고 무리라고 생각한다. 소니는 품질이 뛰어난 워크맨이나 비디오 장비로 유명해졌지만, 십여년 전부터 기업의 사업구조가 많이 달라졌다. 음악, 영화, 게임 산업에 엄청난 투자를 해서 엔터테인먼트 회사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그에 비해 삼성의 주력 사업이라면 휴대폰, 디스플레이, 메모리 등 제조산업에 국한되어 있다. 실제로 소니 침몰에선 삼성전자보단 아이팟을 내놓은 애플을 더 많이 언급한다. 어찌보면 소니가 자신을 키워준 사업보다는 쉽게 돈 벌 수 있을 듯한 사업에 주력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을지 모른다.
미야자키 타쿠마도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다. 잘못된 경영 판단에 따라 한물 간 브라운관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과 동시에 회사 내부의 기술 경시 풍조가 확산됨으로써, 고객이 기대하지도 못한 앞선 제품을 내놓았던 과거의 경쟁력이 사라졌다고 한다. 경영자가 사원들 앞에서 TV가 한대에 10엔이 되는 시대가 온다
는 둥 망발을 서슴치 않았으니 말 다했다. 어떤 엔지니어가 10엔 밖에 안 하는 저가품이나 만들려고 할 것인가? 나 역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사장이 사원을 모두 모아 놓고 기술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마케팅이 잘 되야 성공한다
라고 말하는 바람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정신을 찾은 후, 회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훌륭한 괴짜 엔지니어가 많았던 소니에 기술 경시 풍조가 퍼지게 된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내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라면 아마 선진경영기법의 도입이 문제가 됐다는 주장일 것이다. 사업부 각각을 하나의 독립회사처럼 취급하는 컴퍼니 제도는 선진 경영 기법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는 각 사업부 간의 쓸데없는 경쟁을 촉발해서, 서로 유연하게 협력하던 과거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미야자키 타쿠마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컴퍼니 제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컴퍼니 제도라고 하는 개념에 연구개발 분야까지 동일하게 포함시켜 버린 판단미스에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필요했던 기초 연구가 중지됨으로써 성장 동력을 잃어버리게 됐다. 더불어 당장 성과가 안 나는 연구소를 폐쇄하는 바람에 엔지니어가 먼저 해고 당하게 됐다. 당연히 해고 당하지 않은 엔지니어까지 사기가 꺾이게 됐다. (한국이 기초연구분야를 개혁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IMF 이후에 엔지니어 중심으로 대량해고가 벌어졌던 것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EVA, 즉 경제적 부가가치 역시 폐해만 속출시켰다. 최고의 제품은 그게 가능하기나 해!
라는 평가를 딛고 나온다. EVA는 경영 관리를 건전화시킨다고 하지만, 실상 ‘돈’에 따라 모든 걸 결정하게 만든다. 그러니 무모해 보이는 상품은 더 이상 개발할 수 없게 됐다. ISO 9000 등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품질 표준화를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일본의 장인정신을 해치게 됐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순간 설익은 컨설턴트들이 설치고 다니며 선진경영기법이라고 팔아먹는 게 자칫 잘못하면 회사 하나를 망쳐놓고 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비록 소니 침몰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지만, 내 감정은 미묘했다. 소니의 몰락을 보고 고소해 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안고 산 책이건만, 오히려 소니가 되살아놔 주길 바라게 됐다. 현재 모습은 어떻든 간에 과거의 소니는 정말 멋진 기업이었다.
- 당시 소니에는
엔지니어를 설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전문지식이 없는 기획자는 의미가 없다.
는 불문율이 있었다. 자유롭고 활달하며 유쾌한 이상공장의 건설
, 이부카 마사루-
기술에 대한 타협은 고객에 대한 모욕이다.
이 말은 바이오의 엔지니어들이 자주 입에 담았던 말로 바이오철학이 담긴 좌우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의 비전이나 분위기가 이보다 더 멋질 수가 없다. 이런 환경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상품 개발이 중단된 데 끝까지 항의하는 현장 실무자가 많았고, 때에 따라선 경영진이나 관리층을 설득해서 성공을 이뤄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플레이스테이션이다. 당시 소니의 회장이었던 오가는 게임 따위는 개발할 가치가 없다
고 했단다. 그럼에도 쿠타라기 켄은 회장이 지겨워할 만큼 끈질기게 기획서를 올려서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신념을 밀어붙일 수 있는 회사가 어디 그리 많던가?
친구가 말하길 이 책은 소니 내부에서도 화제가 됐다고 한다. 정말 미야자키 타쿠마가 말한대로 회사가 무너지는 건 아닌지 다들 불안해 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타쿠마가 소니를 살릴 유일한 인물로 손꼽았던 쿠타라기 켄마저 곧 현직에서 물러난다니, 소니가 어찌될지 걱정된다. 유쾌한 이상공장의 이상마저 소니와 함께 몰락하는 건 아닌지 안타깝다.
요즘 소니는 과거의 후광을 입어 살아가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워크맨이란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지도 생각이 안 나네요.
스파이더맨 3가 기업 실적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그다지 상관 없어 보이니 더 안타깝네요.
sony style…
친구덕분에 오픈가격으로 밸류팩을 구입할 수 있었다. 울나라에서는 세상에 ~ 10만원이나 붙인 36만원에 팔고 있었다. 암튼 요모조모 만지작거리고 릿지도 해 봤는데.. 매번 소니는 사람을 감탄하게 만든다. 나의 주위에서는 날 소빠라구 하지만 나는 디자인의 심미성을 전자제품에 아름답게 녹아들게 만든 소니의 능력에 경탄을 보낸것 뿐이다. 삼성의 시가총액이 소니를 앞지르고…
sony style…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삼성에게선 소니 같은 뭔가를 느낄 수 없죠. 제품만큼은 혁신적입니다만, 그것 이상을 바라면 안 될까요? 삼성에 취직하려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하나같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하니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회사입니다. 회사는 성장하는데 사람들은 돈 빼면 좋은 회사가 아니라고 하고. 삼성 스타일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부정적인 생각만 떠오르네요. -_-;;
멋진 서평 잘 읽고갑니다. 마지막에 불렛포인트로 정리된 회사의 신념들은 감동을 주네요. 결국 업의 본질을 놓치면 어떻게 되는지 다시금 곱씹어볼만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저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광을 무너뜨리는 것은 곧잘 그 영광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위장해 소리없이 다가온다. …. 어쩌면 어두운 그림자가 이미 조직 전체에 스며들어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이오 절정기에 있었던 우리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Contengency Versus Consistency
On the Case of Starbucks Coffee
In my opinion, this news should be in a series of PR program published by Starbucks management. But anyway, this case suggests what should a management focus on; balancing between contengency and consistency, an iss…
삼성이 소니보다 잘 되가서 쾌감을 준다는 뜻은 아니었구요. 기술회사가 기술을 경시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줘서 ‘역시 기술이 중요해!’라는 느낌에서 쓴 글이었습니다.
아, 저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진 않았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었나 봅니다. 어디가 문제인가 살펴보니 “호사가들은”이란 부분이었던 듯 한데, 여기서 지칭하는 호사가란 지난 몇 년간 신문이나 TV 또는 일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말하려고 쓴 단어일 뿐입니다.
제가 오해를 한게 맞습니다만 오해의 원인은 ‘미야자키 타쿠마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입니다. 그런데 전혀 기분나쁘거나 해서 댓글을 달았던건 아니고 제가 워낙 글을 오해하기 쉽게 쓰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런데 제 블로그의 아이컨이 나오네요. 저런 신기한 기능은 어떻게 하는건가요?
RE 유겸애비: 아, 그렇게 된거군요. 며칠 전에 괜한 오해로 언성만 높인 일이 있어서 이번에 약간 긴장했습니다. ^^
그리고 아이콘은 Gravatar라는 서비스와 연동한 겁니다. 어떤 블로그 엔진을 사용하시는지 모르겠는데, 플러그인을 찾아보시면 아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앗, 깜박 잊고 넘어갈 뻔했는데 이상하게 댓글 순서가 엉켜서 “제가 오해를 한게 맞습니다만”라고 시작하는 댓글을 지웠다가 복구시켰습니다.
RE 명랑노트’ 시즌 2. 첫 번째 봄: 스타벅스에 관한 이야기네요. 하이테크 회사가 아니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겠지만,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쿠타라기 켄… 그 사람 쫒겨날만 했지요. 한국의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서 그 사람의 별명은 ‘구라까기’였을 정도였으니까요. 허무맹랑한 PS3의 스펙 자랑에 가격이 높아도 아무 문제 없다는 식의 허풍은 당시 유명했지요. 뭐, PS3의 현재의 위상이야 말 할 필요도 없겠지요. 한국에서도 XBOX360은 그럭저럭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PS3은 취급하는 가게조차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PS3의 실패와 360의 성공은, 셀 프로세서, 블루레이 등 성공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미래의 기술들을 무리하게 집어넣은 기술만능주의의 소니와 현재 PC산업에서 무난하게 사용되는 기술을 조합해 조립PC와 별 차이도 없는 무난한 하드웨어를 만들어낸 ‘적절한’ 경영전략을 내세운 MS의 차이였다고 봐야 할 겁니다.
경영 사례를 많이 볼수록 외부로 드러난 사건만으로 잘잘못을 가리기 힘들다는 걸 느낍니다. 진짜 쿠타라기 켄씨가 지휘를 잘못해서 실패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소니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인재 유출이 심해진 탓도 있을 겁니다. 진실이야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선 알기 어렵겠죠. 추측일 뿐이니까요.
어쨌든 PS3의 실패 이후 구타라기 켄 자신도 인터뷰에서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소니의 기술 개발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최소한 책임감 있는 경영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셀 프로세서나 블루레이 등 모험수가 많았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본래 그런 점 때문에 소니가 사랑 받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오버 스펙, 오버 퀄리티. 실패하기도 하지만 도전 정신이 높게 평가 받았죠. 워크맨 전성기를 떠올려 보면, 말도 안 되는 제품도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사줬더랬죠. 고만고만하게, 안전만 추구해선 존경 받는 기업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니 대신 장황하게 변명해 봤습니다. 안타깝긴 하지만 실패한 이상 책임 지는 수밖에 없겠죠.
[…] 소니 침몰 – 미야자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