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영문학 과제로 썼던 글이다. 자료 정리하는 중이다.
작가 소개 : William (Gerald) Golding
윌리엄 골딩은 영국의 콘월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의 브레이스노스 대학에서 수학하며 처음에는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낀 골딩은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고 고대 영어 시대에 속하는 ‘Beowulf’를 깊이 연구했다. 1930년 자신의 처녀 시집을 발간하여 시인으로 출발하는가 했더니 그것을 포기하고 윌트셔로 가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196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 주에 있는 홀린스 대학에서 1년간 초빙 교수로 강의했다. 또한 이 작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가 2차 대전 중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로킷함을 지휘하는 하급 장교로 활약하다가 디데이를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종군 경험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2차 세계대전은 나에게 특기할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말 온몸이 돌처럼 굳어지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겁나더군요. 전쟁이 나의 인생 행로의 전환점이었습니다. 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2차 세계대전이란 것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비인간적이고 이질적인 어떤 것이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면 두 개의 눈과 다리와 심장을 가진 우리와 몰골을 같이 한 생물이 만든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어 볼 기회가 나에게 온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은 위에 인용된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 인간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일으키는 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전후 작가들이 품었던 것과는 질이 다른 것이었다. 즉 헤밍웨이를 위시한 소위 ‘Lost generation’이 느끼던 환멸과는 차원이 다른 회의였다. ‘Lost generation’은 환멸로 인해 인생의 방향 감각을 상실한 데 반해, 골딩이 느낀 전쟁에의 환멸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확신을 그의 의식 속에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전쟁과 살육의 원인을 사회 또는 이념의 허구성에서 찾지 않고 인간 본질 속에 내재한 악의 응어리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1954년에 쓴 그의 최초의 소설 ‘파리대왕’ 속에서 그러한 인간 본질에 내재한 악을 들여다보는 X-ray 사진을 촬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집안은 원래 많은 교육자들을 배출한 가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도 근 20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다. 따라서 그의 교육자적 관심은 예술가적 의욕에 못지 않게 문학에 대한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소설이 무엇을 묘사할 수 있느냐보다는 소설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그에게는 더욱 중요했던 모양이다. 작가의 ‘사회참여’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사회를 개조하려는 참여가 아닌 인간을 개조하기 위한 참여에 더 열성적이었다.
나의 성격은 원래 심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대한 가공할 무지로 인해 수난을 겪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견해가 진실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신념에서 나는 나 자신의 견해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간의 딜레마에 전폭적인 관심을 쏟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딜레마를 세금이나 천문학의 문제라기 보다는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어느 잡지사에 보낸 설문해답인데, 여기서 알 수 있듯 그가 의미하는 전폭적인 관심이란 사회·정치·경제상의 문제, 다시 말해서 시사성을 띤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시대와 장소의 변화에 관계없이 영원히 변치 않는 인간 본질 내지 인간 조건에 대한 관심이다. 인간의 진실된 상이 무엇인가를 통찰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작가의 자세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그러한 신념의 적절한 표현양식을 우화적 상징 소설에서 발견했다. 그로 인해서 그의 소설은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줄거리나 성격 묘사에 대한 관심보다 추상 개념과 도덕적 명제에 초점을 맞춰 소설을 쓰다 보니 우화 작가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앨런의 ‘현대소설(The Modern Novel)’을 보면 골딩은 자기 작품을 우화라고 부르지 말고 신화(myth)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대목을 볼 수 있다.
Frank Kermode 교수는 한때 골딩은 영어로 글을 쓰는 현역 작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보는 것이 공통적인 견해
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받아 월터 앨런은 공통적인 견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대중의 의견이라기보다 지식층과 학계에만 깔린 견해라는 것을 첨가해야겠다,.
고 전자의 칭찬에 수정을 가했다. 이 발언이 골딩을 치켜세우는 것인지 깎아 내리는 것인지는 두고두고 음미할 문제인 것 같다.
도덕적 주제를 담은 상징성이 독자층을 제한한다는 점에서는 애석한 일인지 모르나 이것은 현대작가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국면이다. 상황설정도 언제나 주관적 생존이나 개인 경험을 철저히 배제하고 가장 본질적인 문제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현실과 되도록 멀리 설정하는 그의 작가 정신은 정말 부럽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의 작가들 중 많은 수가 상황 설정을 자기 주변, 그것도 현실감각에 남달리 민감해서가 결코 아닌, 밀접히 자신들과 밀착된 부분에다만 고집하는 현실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 — 그것은 정말 거저 주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 외의 작품
네안데르탈인의 최후를 배경으로 한 ‘계승자들 The Inheritors'(1955) 역시 근본적으로 난폭하고 타락한 인간성을 그렸다. ‘핀처 마틴 Pincher Martin'(1956)에서는 전함이 어뢰에 맞아 고통스런 죽음을 맞게 된 해군장교가 죄책감에 싸여 옛날을 회상하는 것을 묘사했다. 소설 ‘끝없는 추락 Free Fall'(1959)과 ‘첨탑 The Spire'(1964) 역시 벌이 꿀을 만들어내듯이 인간은 악을 만들어낸다
는 골딩의 신념이 잘 반영되어 있다. ‘투명한 암흑 Darkness Visible’ (1979)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런던 공습 때 끔찍한 화상을 입은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최근작으로는 부커 매코넬상을 받은 ‘성인 의식 Rites of Passage'(1980)과 수필집 ‘움직이는 표적 A Moving Target'(1982)·’ ‘종이 인간 The Paper Man'(1983) 등이 있다. 그의 책은 영미 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읽혀, 작가에게는 ‘캠퍼스대왕’ 이라는 별명이 붙어있기도 하다.
줄거리
한 떼의 영국 초등학교 소년들이 피난길에 오른다는 설정에서 이 작품은 시작된다. 미래전쟁에서 원자탄의 세례를 받게 된 영국으로부터 6세 내지 12세 또래의 소년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가 적기의 습격을 받게 되고 추락 직전, 승객 튜브라는 안전 장치의 발사로 소년들은 다치지 않고 열대의 무인도에 안착한다.
이들은 저희끼리 랠프를 대장으로 선출하고 그의 명령하에 구조된 때까지 자활하기로 결의한다. 소라껍질을 찾아 나팔로 사용하고, 회의를 소집할 때에는 이 소라를 분다. 또한 회의장에서 발언할 때에도 손을 들고 소라를 받아 손에 쥐어야 한다. 소년들은 이 소라를 축으로 막연하나마 민주적 질서를 세우려고 시도한 것이다.
랠프는 잭의 희망을 존중하여 사냥 부대를 이끌고 멧돼지 고기를 구해 오고, 또한 산정의 봉화를 살펴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중책을 그에게 맡긴다. 불은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 특히 상식과 이성이 있는 대장 랠프와 그를 추종하는 몇 명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불을 피워 봉화대를 만들고 거기에 생나무를 태우면 연기가 오르고, 연기가 오르면 언젠가 이 섬을 지나가던 비행기나 선박이 그것을 보고 구조하러 달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냥과 놀이에 재미를 붙인 잭은 불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어느 날 수평선 밖으로 가느다란 연기를 보이며 배가 가물가물 지나가는 것을 본 랠프는 산정의 봉화대까지 달려가 본다. 불 관리를 소홀히 한 나머지 봉화는 꺼져 있었다. 모처럼 다가온 기회가 무산된 것이다. 랠프는 대장의 입장에서 구조의 소중한 기회를 놓친 점과 질서가 문란해졌다는 사실을 들어 잭을 힐책한다.
랠프와 잭 사이의 노골적인 반목이 표면화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다. 회의를 소집하여 행동보다 말만 앞세우고, 사냥해서 고기를 얻는 실용적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명령만 하는 랠프의 모습이 잭의 눈에는 몹시 못마땅하게 보인다. 만사를 토론에 부치고 심지어 꼬마들에게까지 동등한 발언권을 부여하는 랠프의 민주주의 운영방식은 잭이 보기에 너무 비능률적이다. 잭은 중요한 결정권을 소수가 휘두르는 지도방식을 원한다. 사냥 부대를 거느리고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끝을 예리하게 만든 창으로 무장한 잭은, 중의에 의하여 민주 방식으로 대장에 선출된 사실을 강조하고 항상 질서를 주장하는 랠프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밤이 되면 꼬마들이 정글의 소리와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리, 낮에 바다 위에 나타났던 신기루의 요술로 인해 악몽에서 헤매다가 고함치고 우는 일이 매일 계속된다. 헛것을 보고 괴물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일은 비단 꼬마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때 잭은 자신의 힘과 창으로 그 짐승을 쳐부수겠다고 호언한다. 그러나 랠프와 새끼돼지는 이 섬에 짐승은 절대로 없다는 이성과 순리의 소리로 맞선다.
잭은 이 말을 하면서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일어났다. 두 소년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한편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희열과 전략의 세계가 있었고 또 한편에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산봉우리에 진짜 짐승이 나타난다. 그 커다란 짐승은 개구리처럼 몸이 부풀어올랐다 줄었다 하면서 이상한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랠프와 잭과 로저가 정찰을 나갔다가 그 짐승의 실재를 확인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정찰에서 돌아와 보고하는 회의석상에서 별안간 잭이 허위로 진상을 폭로한다. 잭은 대장인 랠프가 짐승을 보기도 전에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선전한다. 랠프는 그렇지 않고 산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앞장섰다고 항변한다. 거기서 고백하긴 싫었으나, 언제나 공정한 랠프는 정상에서 짐승을 보았을 때 혼비백산해서 자기도 도망치고 잭과 로저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한다. 분노한 잭은 랠프의 대장 자격을 묻는 투표를 제의한다. 물론 잭의 의도는 무산된다.
잭은 랠프의 통솔 하에 머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혼자 회의장을 떠난다. 이후 잭의 사냥부대와 그 밖의 아이들이 하나 둘 잭을 찾아 오두막을 떠난다. 이제 잭이 이끄는 사냥부대는 얼굴과 몸을 색깔이 있는 진흙으로 칠하여 흡사 원시적 토인을 연상케 한다. 잭이 멧돼지의 예민한 후작을 알아차리고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이제 그의 부하 전체에게도 하나의 의식으로 확대한다.
이렇게 야만화된 잭의 일당은 랠프의 진영으로 쳐들어가 불을 훔쳐 오고 암멧돼지를 잡아 해변에서 잔치를 벌이며 토인들의 춤을 춘다. 잭은 자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아이는 바위 뒤에 묶어 놓고 매질까지 한다. 잭의 생활 양식은 질서와 이성을 떠난 원시적이며 야만적인 행태로 치닫는다. 그는 오직 폭력과 공포에 의하여 집단을 다스린다.
한편 랠프의 이성적이며 인간적인 통치 방식은 무기가 없어 사냥을 해오지 못하는 경제적 무능력 때문에 아이들을 잭에게 하나 둘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 날 밤, 잭의 습격을 받아 불을 얻는 유일한 수단인 새끼돼지의 안경까지 강탈당한다. 이것은 심한 근시인 새끼돼지가 눈을 잃은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구조를 얻는 유일한 수단인 봉화를 잃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불을 달라고 요청하면 언제라도 줄 텐데 어째서 안경을 강탈했느냐고 잭의 본부로 찾아가 항의를 하던 와중에 새끼 돼지가 로저가 떨어뜨린 돌에 맞아 죽고, 혼자 남은 랠프도 쫓기는 몸이 된다.
좁은 섬에서 잭의 추적을 받아 독 안에 든 쥐 마냥 궁지에 몰린 랠프는 굶주림과 공포와 절망에 빠져 이리저리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러다가 잭이 랠프를 잡으려고 숲에 불을 놓게 되고, 지나가던 군함이 그 연기를 보고 섬으로 접근해와 결국 해군장교에게 구출된다.
소설에 대한 감상
나에게 있어 유년기라 부를 수 있는 시기에,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 정도 사이의 시기에 가장 즐거웠던 일이 무엇이었는가 아릿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두 가지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지금은 작아 보이는 넓디 넓었던 아파트 뒤편의 주차장에서 ‘들고 치기’ 같은 아이들 식의 야구를 하며 뛰놀던 기억이고, 나머지 하나는 여러 책을 읽으면서 공상의 세계에 빠지던 일이다. 그림책 전집에는 우정과 정의, 모험으로 가득했고 과학책에 그려진 자연의 모습은 아름답고 질서정연했으며, 미래의 모습은 환상적이고 희망이 넘쳐났다. 이 무렵만 하더라도 나에게 세상은 적도, 위협적인 존재도 아니었다. 세상은 모험과 즐거움이 넘치고, 그 당시에는 정확한 의미는 몰랐지만 ‘이성’이 지배하는 그러한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저녁–토요일 저녁에만 영화를 보는 것이 허락되었다.- 영화 ‘파리 대왕’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십여년의 세월만큼 기억도 흐릿해져서 그 영상은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그 때 받은 충격만큼은 생생하다. 기대했던 모험과 용기, 정의, 환상의 세계는 온데간데 없고 파리가 들끓는 돼지 머리의 역겨움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불길을 헤치며 달려가는 주인공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자신의 이상과 어긋나는 현실 때문에 고민하고 싸우고, 그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며 갈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괴로울 정도로 격정에 휩쓸렸던 때를 지나 자신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지금 원작 소설을 읽어본 느낌은 다소 색다르다고 밖에 달리 표현하지 못하겠다. 예전 같으면 흥분하고 분노하며, 인간은 역시 어쩔 수 없다라는 자괴심을 감추기 힘들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냐 하면 뭐랄까, 이제는 차분하게 작품의 의미를 음미해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소설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픽션인 만큼 등장 인물에 대한 해석과 의미 부여는 독자의 몫이고, 그러므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언자적 기질을 가진 조용한 사이몬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이성과 품격 모두를 적절히 갖춘 랠프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사람, 폭력과 욕망에 이끌리는 악한 잭의 모습을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 등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가엽게, 그리고 비참하게 돌에 깔려 최후를 맞이 한 ‘새끼 돼지’가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이 아이에게는 여러 가지 결점이 있다. 사실 작중에 모든 인물이 결코 완벽한 영웅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새끼 돼지’의 결점, 약점만큼 부각된 경우가 없다. 뚱뚱한 몸매에 육체적 결함을 뜻하는 안경을 쓰고 있는 탓에 안 그래도 또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쉬운 데, 그 자신의 냉소적인 태도 때문에 더욱더 고립되어 간다. ‘새끼 돼지’에게 있어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할만 한 것 있다면 조숙한 지적 능력을 뒷받침해줄 경험이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상황에 적절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당연한 것이며 마땅히 지켜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실제로 작중에서 ‘새끼 돼지’는 잭을 위시한 많은 아이들에게 멸시 당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느낀다. 한때 ‘새끼 돼지’ 마냥 나 자신도 비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이 보이는 동급생에게 일종의 투쟁 본능을 느끼고, 불합리함에 대적했던 적이 있었다. ‘새끼 돼지’와는 달리 나에게는 눈에 띌 정도로 강한 육체가 있었고, 암묵적인 어른 세계의 지원이 있었다. – 이를테면 같이 싸워서 교무실에 불려가도 성적이 좋고, 평소에 선생님들에게 공손한 나는 보다 가벼운 처벌만을 받을 뿐이다. – 그러나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아직도 내게 있어 그 때와 관련된 모든 것이 다가가기에 꺼려지는 장소이며, 금기이다.
이제는 그러한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겪은 덕분에 자신의 의도를 어떤 식으로 상대에게 전하고 요구하면 되는지에 대해 적잖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새끼 돼지’는 자신의 부족함을 메울 수 있는 시간을 부여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아쉬움과 동정을 금하기 힘들다.
‘새끼 돼지’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그에게서 예전의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새끼 돼지’는 육체적인 면에서 약했을 뿐만 아니라 소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겁나고 두려운 와중에도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굽히지 않았을 뿐더러,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알리려 했다. ‘새끼 돼지’는 자신의 최후에 가까이 다다른 무렵, – 물론 ‘새끼 돼지’는 자신의 운명을 몰랐겠지만- 잭과 랠프가 뒤엉켜서 치고 박던 와중에 그는 소라를 쳐들고 말한다. 난 소라를 들고 있어!
이 한마디 말이 내포하는 위대함이란. 나는 ‘새끼 돼지’가 야만인이 되어 버린 아이들에게 소라를 쳐들고 이성을 호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새끼 돼지’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진정한 지식인이었다. 실로 감동적이었다. 바위에 깔려 비참하게 나뒹굴게 되었지만, 그러한 처참함이 오히려 그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듯 했다.
로저도 나의 관심을 끄는 인물이었다. 사실 로저는 그리 주목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두워 보이고, 소심한 듯한 아이였다. 해변에서 놀고 있는 헨리 주위로 자갈을 던질 때만 하더라도 옛 문명 생활의 금기가 로저를 붙잡아 주었다. 그리하여 헨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돌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마스크를 통해 차츰 수치심을 잃게 되고 야만적으로 변해간다. 급기야는 안경을 잃어 이미 무력해진 ‘새끼 돼지’를 절벽 위의 바위를 굴려서 무참하게 죽여버릴 정도로 포악한 파괴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그에게는 새끼 돼지는 그저 비계덩이같이
보였을 뿐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이 세상에 ‘로저’들이 얼마나 많은지 절절히 느낀 적이 있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믿고 있던 나에게 있어 그러한 발견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느낌이 든다. 물론 누구나 ‘로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만큼이나, 극한의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그리고 의연하게 대처하여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낸 평범한 영웅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비록 ‘파리 대왕’에서는 좋지 않은 결과를 맺고 말았지만, 내면의 악에 도취하지 않은 아이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약간이나마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처럼 오류를 범하지만 그래도 이성과 상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랠프, 이지적이고 합리성을 옹호하는 ‘새끼 돼지’, 그리고 비록 잭으로 대표되는 악에 무릎을 꿇고 말지만 마지막까지 랠프를 보호하려고 노력한 쌍둥이 형제의 모습에서 희미한 희망의 빛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까? 나는 차라리 그러한 어리석음에 자신을 맡겨보고 싶다.
영화에 대한 감상
영화에 대한 감상에 앞서 한가지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해리 훅’ 감독의 1990년 작품인 ‘파리 대왕’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어릴 적에 감동 깊게, 동시에 상당히 충격적으로 보았던 영화였던 탓에 아무런 생각 없이 골랐지만 알고 보니 1963년에 피터 브룩스(Peter Brook’s)가 감독한 작품도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부터 말하자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전달하기 위해 각색을 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상황을 단순화시켜버려서 아무래도 주제 전달이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원작과는 달리 아이들은 모두 같은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이것은 복잡한 인간관계를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인 듯 하지만, 원작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희석시켜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원작에서는 상당수에 달했던 작은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작은 아이들은 큰 아이들의 책임과 의무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는데, 그들이 빠짐으로써 다소 김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상황 설정 중에서도 가장 큰 실패였던 것은 ‘잭’을 문명사회에 있을 때부터 문제아였다고 설정한 부분이다. 해변에서 낚시를 하던 아이들이 랠프에게 그는 문제아여서 사관학교에 오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 해준다. 물론 원작에서도 처음부터 잭에게서 권력지향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두드러지다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잭을 보다 보편적인 인간상으로 보이도록 할 수 있었다. 영화는 그러한 면에서 다소 실패한 듯이 보이다. 문명 사회에서부터 문제아였다는 설정을 한 덕분에 잭이 악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간단히 처리할 수는 있었지만, 악의 보편적 내재라는 중요한 테마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듯 하다. 상황을 보다 간결하게 처리하려다 이런 식으로 주제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만 경우는 이 외에도 많이 있다.
이제 실컷 흉을 봤으니 몇 가지 훌륭한 점을 짚어볼까 한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다. 특히 랠프 역을 맡은 소년의 연기는 기억에 남을만 하다. 잭의 일당을 피해 숲에 숨어있을 때의 겁에 질린 표정과 살아남기 위해 미친듯이 불길 속을 헤쳐나가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또 한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은 랠프를 비롯한 아이들이 해군 장교를 만났을 때, 그러니까 문명 세계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잭의 후회와 두려움 섞인 표정이다. 아주 잠깐, 아마 물리적으로 1,2초쯤 될 찰나에 스쳐 지나갔던 그 표정을 잊기 힘들 것이다.
그밖에도 음악도 훌륭했다. 딱히 뭐라 꼬집어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딱딱해지기 쉬운 이야기가 음악 덕분에 살아났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불길에 휩싸인 숲을 헤쳐나가는 랠프의 야성적인 동작과 어울리는 음악은 인상 깊었다.
원작에 비하면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고 후회할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