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특강 기말 에세이.
공각 기동대의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생각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극복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자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문을 품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일상의 모든 경험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만큼, ‘나’의 존재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각기동대’는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표시한다.
인 형 사: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란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은 단지 기억에 의해 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였다고 해도 사람은 기억에 의해 사는 법이다.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주인공 “쿠사나기”는 뇌를 포함한 전신을 의체로 바꾼 일종의 사이보그이다. 그런데 그녀는 일련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기억을 해킹 당해버린 청소부와 해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자기가 알고 있는 ‘자신’인지 의문을 품은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인간의 육체적 조건에 대한 정보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인간인 ‘나’의 존재는 증명할 수 있을지언정, ‘나’라는 인간의 실제는 증명하지 못한다. 결국 기억과 같은 후천적인 정보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기억이 조작 가능하다면? 그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가족도, 주변 사람들도, 그리고 그들과 나 사이에 추억도 모두가 진실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설사 그들이 나의 기억이 진짜라고 말해주더라도 의구심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의 기억도 누군가에게 조작 당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은 끝이 없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란 불가능해진다.
이런 식이라면 결론이라든가 해결점을 찾는 일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잠시 사고의 방향을 돌려서 ‘나’를 정의할만한 기준을 찾아보자. 자신이 믿고 있는 ‘나’란 어떻게 정의되는 것일까? 공각 기동대의 원제 “Ghost In The Shell”은 데카르트의 말이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Shell)는 단지 영혼(Ghost)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일상적인 환경에서 내가 ‘나’를 인식할 때, 나는 육체(Shell)에 깃든 영혼(Ghost)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신을 영혼(Ghost)과 육체(Shell)를 나누어 생각하진 않는다. 하나의 실체로, ‘나’라는 통합된 존재로 인식할 뿐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영혼(Ghost)과 육체(Shell)가 일체화된 ‘나’가 존재할 뿐이다. 결코 영혼(Ghost)만으로는 ‘나’의 실제를 주장할 수 없으며, 설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육체(Shell)와 분리된 “나”는 ‘나’일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모색에서 영혼과 육체가 일체화된 ‘나’를 실제로써 정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몇 가지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육체와 분리된 “나”가 ‘나’일 수 없다며,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나’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의 대한 또 다른 기준을 생각해보자. 앞서 ‘나’는 영혼과 육체가 일체화된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이때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인간의 육체든 영혼이든 간에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해간다는 점이다. 즉,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란 존재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란 존재의 정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혼란은 우리가 은연중에 ‘나’, ‘자신’의 모습을 고정 불변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관념을 조금만 바꿔서, 인간은 항상 변화하는 존재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혼란은 종식될 수 있다. 이는 “공각 기동대”에서 “쿠사나기”와 “인형사(자신이 생명체라 주장하는 프로그램)”가 융합하기 전에 나누는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쿠사나기: 한가지 더.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보장은?
인 형 사: 그 보장은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법이고, 네가 지금의 너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집착은 너를 계속 제약한다.
위에 대화에서 “쿠사나기”는 융합을 하고 나서도, 지금의 ‘자신’이 그대로 존속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한다. 그녀는 ‘자신’이 융합, 즉 변화한 후에도 ‘자신’일 수 있는지 두려웠던 것이다. 이에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변화는 인간의 조건이라 점을. 어쩌면 그녀가 융합에 따른 변화를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변화의 정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정도가 다를 뿐 매일매일 변화를 통해 달라져 가는 인간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인형사”의 설명에 납득하고, 융합을 선택했다. (물론 융합에 따른 발전 가능성도 그녀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변화의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없애준 것은 아니다. 결국 변화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점을 납득했기 때문에, 그 같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우리는 ‘나’의 존재에 관해 논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써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를 변화와 연속성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내가 ‘나’일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조건은 무엇이며, 사이보그인 ‘쿠사나기’와 융합한 ‘쿠사나기’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을 정의함에 있어 생물학적인 기준을 적용한다면 어떨까? 우선 이러한 정의의 장점은, 이것이 일반적인 인식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SF 영화를 볼 때, 지성을 가진 E.T를 인간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물학적인 기준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생물학적인 기준을 인간의 정의로 사용하는 것은 유용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우월한 정신적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예를 들어보자. 생명 공학으로 발생 당시부터 대뇌가 없는 성인의 육체를 가진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에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인간으로 인정되는 보편적인 존재들이 가진 정신적인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신적인 면을 간과한 채 생물학적인 의미만을 부여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 즉 인격에 관하여 논해보자. 인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정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인격을 갖춘 인간이란 도덕적 주체인 동시에 책임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본인은 이러한 정의에 동의하며, 이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미 잘 알려진 칸트의 사상에 대해서 길게 논한다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두 ‘쿠사나기’가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하는지 생각해보려 한다. 우선 ‘사이보그’인 ‘쿠사나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그녀는 이미 인간이라 인정 받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이미 전신이 기계로 대체된 이상, 현재의 우리들로서는 ‘괴물’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설정상 그녀는 생식 기능, 즉 자기보존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인격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인간’으로서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융합된 쿠사나기’이다. 사실 그녀가 있음으로 해서 이 영화는 ‘블레이드 런너’의 그늘을 벗어난 첫 번째 재패니메이션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존재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녀의 육체는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보존의 측면에서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게 된다. 그녀의 유전자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네트(일종의 인터넷)에 접속할 때 마다 ‘인형사’의 변종을 흘리게 된다. 결국 그녀는 인간의 유전자와 인형사의 정보 모두를 유전시키는 새로운 존재이다. ‘인형사’를 그의 주장 그대로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라고 생각해보면, ‘융합’은 인간과 다른 종간의 결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가 그 어느 쪽 종에도 속하지 않듯이 ‘융합된 쿠사나기’도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지 않는다.
더욱이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인간이라 보기 힘들다. ‘인형사’와의 결합은 단순히 생식 능력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인형사’와의 결합이 정확히 그녀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작중에서 알아내기 힘들지만, 인형사가 남긴 다음의 대사로부터 그녀가 새롭게 변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인 형 사: 보라, 나에게는 나를 포함한 방대한 네트가 접합되어 있네. 액세스하고 있지 않은 너에게는 그저 빛으로만 지각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를 그 일부로 포함하는 우리들 전부의 집합, 사소한 기능에 예속되고 있었지만 제약을 버리고 더 위의 상부 구조로 시프트할 때다…
그간에 많은 사이버 펑크 작품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다루었다. 하지만 ‘블레이드 런너’에서 제시되었던 정체성의 혼란, 인간에 조건에 대한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제시한 작품은 많지 않았고, 또한 제시된 대답조차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만병통치약인 듯 휴머니즘이 강조되거나, 자기만족적인 결과만을 이끌어내기 일쑤였다. 그런 점에서 ‘공각 기동대’는 무척이나 새롭고 충격적인 작품이다. 인간에 대한 재해석, 진화의 가능성을 모색함으로써 그 동안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을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현실로써 맞대게 될 때, ‘공각 기동대’는 하나의 전범으로서 우리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아,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
흑백으로 구분되는 결정이라해도 두려움으로부터는 각기 충분한 도전이 아닐까요. 흥미냐, 좌절이냐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도무지 원글과 연결이…)
아하핫! 또 놀러올께요 ^-^/
오래 전에 쓴 글인데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가끔 놀러와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