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과 진로

아라는 KAIST인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다. 근래에는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학점이나 진로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원하는 분야로 가기 위해 학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읽고, 속이 쓰려서 혼났다.

따지는 건 아닌데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저 스스로가 진짜 한심하긴 한데요

그럼 학점말고 뭘 남길수 있나요?

교우관계, 즐거운 학교생활의 추억 이런거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숫자로 남는 학점이 제일 크리티컬하잖아요

학점이 중요하다는 걸 부정하진 않는다. 학점이 좋아야 유수 대학의 훌륭한 교수 밑에서 사사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경쟁률이 만만찮은 세계적인 기업에서 경력을 쌓으려 해도 마찬가지다. 외적 요인만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전문가로써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하다 보면 학점도 자연히 좋아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좋은 학점과 성공을 하나로 본다면, 단단히 착각하는거다. 여기에 고착된 마인드세트를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다른사람에 단시간에(인터뷰와 같은) 보여줄 수 있는게, 수치적으로 남는 학점 말고 어떤게 더 있을까요? ㅎㅎ

인생의 목표가 출세, 취업이라면 학점(논문)이 정말 가장 중요합니다.

학점이 좋으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기회를 얻기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기회를 얻는 건 시작점에 불과하다. 졸업 평점은 입사 면접 때나 중요하지, 그 이후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일단 사회인이 되면 업무 성과로 자신의 가치를 보여야 한다. 누구도 평점이 얼마나 됐어요?라고 묻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좀더 여유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나중에 중요하게 평가 받는 건 엔지니어로써의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평가에 연연해 하지 마시고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해서 계획하고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7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LG 글로벌 챌린저나 ACM ICPC 같은 대회 참여를 가능한 한 많이 할테다. 자신감이 부족해서, 난 안돼라는 자괴감에 빠져서 못 했던 걸 다 해볼테다. 상을 타는 것보단 지금이 아니면 얻기 힘든 귀중한 경험을 얻는 데 초점을 맞출테다. 대회 참여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닐거다. 뜻을 같이 할 친구도 많이 사귀고 친해져야, 대회를 나가던가 말던가 하지 않을까?

후배 중 한명이 LG 글로벌 챌린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얼마나 부럽던지. 수상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바쁜 학기 중에도 또다른 도전을 감수하는 과감함이랄까, 열정이 부러웠다. 몇 해나 그런 정열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좋은 고등학교, 명문 대학을 목표로 그때그때의 열망을 억누르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삶에서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거창하게 삶의 목표라는 주제까지 나아갔지만, 이런 외도(?)는 현실 삶에도 도움이 된다. 실제로 이 후배는 세계적인 경영 컨설팅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일년에 한 두명 정도만 선발하는데, 당연하게도 평점이 3.8을 넘을 뿐더러 모든 면에서 그녀에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실력자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LG 글로벌 챌린저 최우수상은 일년에 한팀만 나온다. 대회 참여는 그녀가 스스로 목표를 부여하는 열정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보여주고, 팀 구성원으로서 일할 줄 안다는 걸 증명한다. 수상 경력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모두 학점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면이다. 학점 인플레 시대에 다른 사람에게 단시간에 보여줄 수 있는 걸로는 이거야말로 최고의 소재가 아니었을까?

대회 참여만이 유일한 수단은 아닐 것이다. 게임 기획자가 되고 싶다던 후배에겐 면접시에 게임 시나리오를 들고 가라고 조언해주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 포트폴리오 정도는 있어야 말이 된다. 인사팀에서 경력을 쌓고 싶다면, 성과급과 동기부여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정도는 되야 한다. 그럴려면 학점을 떠나 스스로 필요한 걸 찾아 공부하고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여유롭게 세상을 바라보고 차분하게 자신의 경력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이제 막 진짜 사회인이 되려는 참이긴 하지만.)

최 재훈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고성능 서버 엔진, 데이터베이스, 지속적인 통합 등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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