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이 삼켜버린 책들

이민 가면 어떤 점이 좋을까? 상당한 금액의 연봉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세금이 그만큼 만만치 않으니 엄청난 장점은 아닐지 모른다. 칼퇴근이 당연한 문화가 구미에 당기긴 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눈치 안 보고 일찍 일찍 집에 돌아가지 않는가? 물론 부족한 분량을 채우느라 집에서 일할 때가 많긴 하지만, 즐겁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니 이 역시 불만거리는 아니다.

이민을 꿈꿀 때 나의 환상을 채워주는 으뜸가는 즐거움은 돌고래와 수영하는 상상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본 한 가족이 떠오른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대양 한가운데로 나선다. 흰 요트와 푸른 바다, 바다의 색을 머금은 하늘. 돌고래와 수영하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좁디 좁은 아파트를 떠나 2층짜리 그림 같은 주택에서 사는 꿈도 있다. 부대끼며 사는데 익숙해 넓디 넓은 곳에선 외로우니 집이 크다고 뭐가 좋을까? 그럼에도 한가지는 매력적이다. 나만의 서재를 갖는 것! 놓을 자리가 없다고 책을 누군가에게 주거나 팔거나 버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장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bookshelves

그곳엔 책이 작가별, 주제별로 가지런히 놓이리라. 어제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했듯 결코 나도 모르는 새 없어지는 책은 없겠지.

  • 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 해변의 카프카 – 상, 무라카미 하루키

  • 태엽 감는 새 – 2권, 3권, 4권, 무라카미 하루키

  • 렉싱턴의 유령 – 무라카미 하루키

엊그제 실종 처리한 책들이다. 어디로 갔을까? 한 권씩 꺼내 읽다 책장 사이에 조그만 공간이라도 있으면 그곳에 집어넣곤 했다. 책을 집어삼키는 불가사의한 블랙홀이라도 있는 걸까? 넓은 그곳엔 책마다 편히 쉴 공간이 넉넉할 테고 책과 공간의 밀도가 블랙홀을 만들어낼 정도로 결코 지독하지 않을 것이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 놓은 내 모습을 떠올려 본다. 무료할 땐 아다치 미츠루나 닐 게이먼의 만화책을 꺼내겠지. 비 오는 날엔 서재에 놓인 스테레오 오디오에 노라 존스나 카우보이 비밥 O.S.T를 올리고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을 꺼내 읽으며 한국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이만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꿈 같다.

최 재훈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고성능 서버 엔진, 데이터베이스, 지속적인 통합 등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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